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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by Om asatoma

장마가 곧 끝이라 해서 그에게 갔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빗소리가 들리는 공간은 아니었지만 건조한 실내에서 마시는 진한 커피의 맛이 그리웠다. 똑똑. 그 방의 문을 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딘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와 같이 피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몸이 카페인을 너무나 원하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은 그가 느리게 일어나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고, 탬핑을 하는 동안 시선은 탬퍼에 머물렀다. 어딘가에 유격이 있었다. 연속된 동작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느꼈다. 태핑이 너무 강했는지 커피 표면에 균열이 인 것이 보였다. 힘 조절이 안 되고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시간은 흘렀고 커피는 완성되었다. 그 자리에서 한 모금 마셨다. 할 말을 잃었다. 커피맛이 변했다. 묵직한 느낌도 없고 그렇다고 산뜻하게 깔끔하지도 않은 맛.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정체불명의 흑갈색 음료. 이미 매일 해왔던 커피로 몸은 자꾸만 카페인을 원했는데 문제는 깊고 풍부한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내가 원한 맛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면서도 그리움을 가득 안은 맛었다.


그곳에 벽시계가 있는지 몰랐다.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원두가 바뀌었다. 원두 때문일 것이다. 이전에는 아쉬운 대로 마실만 했는데 이번에는 커피잔을 받아들고 있는 나에게 화가났다. 커피를 위해 오전에 급한 업무를 서둘러 마쳤고, 몸 깊숙이까지 빠르게 도달하는 전율을 기대하며 사무실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몸이 이미 격렬하게 원해 마지막의 정점만 남겨둔 상태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 순간을 기다렸지만 입술과 혀를 지나 몸 안으로 들어갈 때, 어떤 아쉬움에 몸과 마음을 둘 곳을 잃었다. 허무함이 밀려왔다. 당황한 기색을 비쳐도 되는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흘렀고, 스스로 만든 정적을 깨고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혹시 진해에 커피가 맛있는 곳 아세요? 특별한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다. 물론 언젠가는 맛있는 커피집에 나란히 앉아있는 그림을 그린 적도 있지만 지금은 순수하게 정말 맛있는 커피가 먹고 싶었고, 그의 커피 취향이 궁금하기도 했다. 당신은 어떤 노래를 즐겨 듣느냐, 어떤 종류의 책을 읽는가와 같은 그의 취향을 묻는 것이기도 했다. 어느 커피집을 소개해주면 그곳을 찾아 기꺼이 그를 생각하며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취향은 이렇구나를 알고 싶은 마음도 함께 있었다.


그런데 공간에 너무나 걸맞는 대답이 돌아왔다. 커피는 기호식품이기 때문에 추천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거다. 화를 이어갈 의지가 없음과 관계를 이어갈 의지가 없음을 동시에 확인해주는 대답. 불편한 공간에서의 불편함을 견디면서 내가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깎아놓은 사과의 질감이 느껴졌다. 사과를 깎으면 사과는 상처를 입고 공기 중의 산소를 만나 산화되면서 갈변을 일으킨다.


그와 나는 하나의 껍질을 벗고 마주했었다. 시간은 흘렀고 공기 중의 무엇을 만났다. 그와 나 사이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던 무엇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어쩔 수 없이 흘러간다. 더 잘 흐를 수 있게 물길을 터놓는다. 진한 커피의 맛은 지우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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