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백 시즌2; 존재를 긍정받고 싶어 하는 그 여자
by Om asatoma Dec 23. 2020
당신을 위해서 기도했어요
엉엉 울었다. 가슴까지 들썩이면서 울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게 꼭 귀엽고 섹시한 신부님이 아니어도 말이다.
배운 적도 없으면서 그래서 주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것이 분명한 시의 선정과 시낭송 방법으로 무려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단위 시낭송대회에 참가해 낙방해서 세상으로부터 내쳐진 기분으로 야간 버스를 타고 진해 집으로 와 텅 빈 마음을 안고 있을 때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다.
난방기가 돌아가도 바깥 기온이 매우 낮고 사람들이 몇 없었기에 버스 내부는 외투를 입고 있어도 한기가 느껴졌다. 새로 사 신은 구두가 불편해 뒤꿈치만 슬쩍 빼서 걸친 채 창밖 어둠 속 불빛을 응시했다. 나는 왜 누가 시키지도 않은 무모한 도전을 한 것일까. 환영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들 틈으로 뛰어들어간 것일까.
그러고 보니 나의 학부 전공도 인문학 중에서 가장 인기 없는 전공이다. 이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지만 역시 소속 직장에서도 매일같이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나의 존재가 아니라 내 전공에 관한 인식일지라도 환대 없는 세상 속에서 그 중요성을 항변하는 일이 익숙하다. 거부하는 세상 속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일들이 삶 속에서 비연속적으로 일어난다. 때로는 스스로 자처하면서.
플리백의 여주인공은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엉망이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그녀를 둘러싼 세계 속에서 모든 관계와 삐그덕 거리며 불협화음을 이루기는 한다. 그것이 때로는 섹스에 중독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도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녀는 다만 '지금, 여기에'집중하지 못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여주인공이 뒤돌아 카메라를 보면서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장치를 연극에서의 제4의 벽이라는 용어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는 그녀가 그녀의 삶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이기도 하다. 농담은 삶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게도 해주지만 차마 마주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들을 개인적으로 처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녀가 던지는 방백은 단지 표현하지 못한 내면일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알아차리기 두려워하는 주제들을 맞닥뜨릴 때의 불편한 감정을 처리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녀를 진지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 스스로 마주하기 힘든 삶의 장면들은 무엇일까.
거대한 몸부림이었다.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거대한 몸부림이었다. 그림을 배우고, 악기를 배우고, 운동을 배우고 닥치는 대로 배웠고 작은 도전들을 했다. 직장에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각종 공모를 내고 사업계획서와 보고서를 써댔다. 증명해야만 했던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여기에 내가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누구도 있는 그대로의 너 자체로 충분하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물론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일종의 태생적으로 부여받은 숙제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삶이 바쁘고 피곤하고 지쳤다. 시낭송가 인증서를 받는다고 해서 연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당장의 삶이 달라질 것도 아니었다. 허탈하게 서울에서 내려와 새벽 택시를 타고 집이 돌아오면서 나는 왜 이리 애쓰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했다. 그런데 앤드류 스콧이 이야기한다. 당신을 위해 기도했어요.
주인공은 관계들 사이에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떠돌고 있었다. 그 시점의 상대들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뒤돌아 허공에 이야기한다. 의도를 가진 드라마의 장치이기도 하겠지만 주인공이 속한 삶의 반경에서는 누구도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았고, 주인공 역시 누구에게도 진심을 이야기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환대가 없는 삶 속에 표류하는 한 인간일 뿐인 것이다.
그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던 엄마도, 친구 부도 더 이상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다. 이제는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는다. 원래 그곳에 있었던 의자처럼, 거리의 나무처럼, 떠가는 구름처럼 완벽한 타자로 존재한 것이고 그녀 역시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더 이상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줄 사람이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앤드류 스콧이 말했다. 당신을 위해 기도했어요. 주인공이 뒤돌아 허공에 이야기하는 것을 눈치챈 단 한 사람. 주인공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된 사람. 모든 남자들에게 그러했듯이 습관처럼 그에게 관심을 가졌을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달랐다.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제로써 가지는 종교적 신념이 흔들릴 만큼. 한 인간으로서 다른 한 인간을 보듬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고, 주인공은 가벼운 관계만 맺던 과거와 달리 마음을 내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내레이션으로 드라마가 시작되는데, 이 이야기는 완벽한 사랑이야기이다. 사제와의 관계라는 것이 때로 금기된 사랑을 나타낸다고도 설명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나이와 성별을 초월한 한 인간과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사제라는 신분과 사랑을 맺게 한 것이다. 신이 행하는 무조건적인, 종교적인 사랑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사랑, 그러나 남성과 여성으로 대별되는 이성 간의 사랑으로 국한시키기에는 그 의미기 제한적이기 때문에 어떤 이해관계도 작용하지 않는 순수한 인간의 사랑을 나태 내기 위한 설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존재의 이유가 되었던 관계들을 떠나보내고 표류하는 삶을 살았던 주인공이 맺고 싶었던 관계와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내가 맺고 싶은 관계가 일치했기에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다.
앤드류 스콧이 그 말을 했을 때 목놓아 울어가면서. 당신을 위해 기도했어요.
누구에게는 페미니즘 성향이 강한 작품이라고 평가받지만, 남녀의 구도로 나누어 세상을 조명하는 것이 아닌, 존재를 긍정받고 싶어 하는 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잊어지지 않는 큰 상실의 아픔을 품고 멀쩡한 척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