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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Dec 26. 2020

오랜만에 윤도현

노량진에 있었어요. 2001년 겨울. 스물 하나일땐가.. 나이는 대략 그쯤이었어요.


버스를 타고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풍경들이 티브이에서 보던 곳이라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텔레비전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요. 광화문, 종로, 안국, 방배 뭐 이런 지명들만 들어도 너무 신기했지요.


노량진 언덕 위 고시원, 처음에는 창문도 없는 방이었는데, 이만 원인가 삼만 원인가를 더 주고 창문이 있는 방으로 옮겼어요. 서울의 겨울은 추웠습니다. 비가 내린 뒷날인지  기온이 좀 내려가니 바닥이 얼더라고요. 빙판길을 걸어본 적도 없는데 경사진 언덕에서 어쩔 줄 몰라했어요. 학원 시간은 다가오고 발만 구르고 있었어요. 그때 누군가, 고시 공부한 지 한참 된듯한 아저씨가 와서 손을 잡아주며 어디서 왔냐고, 남쪽에서 왔냐고 물었어요. 고민할 틈도 없이 덥썩 잡으면서 그렇다고 대답했지요.


노량진 육교 밑에 있는 버거킹 햄버거는 고소했어요. 크리스마스 즈음인가 혼자 보내기가 아쉬워 서점에 갔다가 오강남 님의 책을 읽게 되었어요. 시험공부하면서도 그분의 논문을 찾아 읽은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yb밴드 5집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쉴 새 없이 들었어요. 그때의 노래를 들으면 지금도 그해 겨울의 서울이 생각납니다.


윤도현의 목소리가 좋아요. 꾸밈이 없고 직선적인 목소리요. 비음이 섞인듯해서 어떤 모성을 끄집어내는 것 같아요. yb5집과 20대 초반 그때의 내가 정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굉장히 섹시한 목소리라고 생각해요. 그런 서정성과 호소력. 독백 같은 가사들.


오늘 행암항에는 고깃배가 많이 들어와 있네요.


사회가 겉모습은 많이 바뀐 것 같은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 패턴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요. 한 개인도 그 경향성을 놓지 못하는 것처럼 이 사회도 그동안 역사적 유전인자에 박혀버린 경향성을 탈피하는 게 힘든가 봐요. 개인의 역사도 반복되고, 사회의 역사도 반복되는 것을 목도하자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20년 전에는 이렇게 공부해서 시험을 치게 되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고, 어른이 된 후에 무언가 기여하게 되는 바가 있겠지 생각하면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지 않고 시험 준비만 하는 것에 대한 어떤 정당성 같은걸 스스로 만들었어요. 각자의 역할이 다르고 나는 지금 할 일이 있으니까 하고 사회의 문제들을 밀어놓았어요. 이해해주겠지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노량진에서 내려온 지 20년이 흘렀는데 아직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요. 그저 내년 사업계획의 방향을 조금 그쪽으로 해야겠다는 생각만 막연히 할 뿐, 넋 놓고 보고만 있습니다.


연대가 그래서 필요하구나 느끼기도 하고요.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 틈에라도 있으면 어떤 희망이나 꿈같은 것은 꿀 수 있을 테니까요.


행암항 멀리 하늘에 걸려있는 해를 보면서 차에 앉아 있습니다. 그 해, 바다에 배가 가라앉을 때에도 뉴스를 보고 기사를 찾아보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기사를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것을 보며 답답한 마음에 바다에 나왔습니다.


다시 들어보니, yb5집은 이제 약하네요.

좀 더 센 걸로 찾아들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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