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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Oct 22. 2019

바다가 내게

한번만 더 살아보라고


‘나’는 바다에 갔고, 바다는 나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 바다에 가게 되었으며, 그 메시지는 무엇인가가 표현된 시이다. 바다가 나에게 전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 메시지는 ‘나’의 생각과 관계없이 바다로부터 나에게 전해진 같지만, 사실은 자연 앞에서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기도 하고, ‘나’의 깊은 내면의 울림이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기도 하다. 절망의 끝에서 찾은 바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 생의 고독한 正午에
세 번째의 절망을 만났을 때
나는 남몰래 바닷가에 갔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경험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고독이나 절망과 같은 극한 단어가 있음에도 첫 연에서 ‘나’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바닷가에 다녀온 후 현재는 치유가 많이 된 상태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이 ‘나’를 바닷가로 이끌었는지, 그리고 그곳에서는 어떤 심적인 변화로 현재의 치유 단계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집중하게 만든다.


생과 삶은 다르다. 의지를 가진 자아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현장이 되는 바탕으로서의 삶과 인간이라는 생명에 놓인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이 절대적 작용을 하는 생은 ‘나’에게 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나’는 삶 속에서 생을 생각하게 되었다.


 부끄러움 없이 열심히 살아온 삶에서 거듭된 절망들이 느껴진다면 숙명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늘이 이끄는 나의 길은 무엇인지 삶 속에서 멈춰 생의 길 한가운데서 물을 수밖에 없다.
처음 만나는 절망 앞에서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것은 의지로 가능한 일이다. 용기라는 이름으로 실패와 좌절을 극복해내어야 함을 주입-교육받기 때문이다. 겨우 일어서 절망이 주는 고됨을 잊을 때쯤 두 번째의 절망이 찾아오면 이번에는 잠시 멈춰서 크게 한 숨을 쉬게 된다. 조금씩 버거워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하는 삶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할 때이다.


‘나’는 세 번째의 절망을 만났다. 처음 느껴진 당황함도 아니요, 두 번째에서 느껴진 익숙함도 아니다. 절망을 세 번쯤 만나게 되면 이제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계속 가도 되는 것일지, 이 길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지, 지금의 애씀이 보상받을 날이 올지. 어쩌면 그러한 의문을 가지기 전에 이미 여러 차례 숨이 턱턱 막히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삶의 어려움이 아닌 생의 절망을 세 번쯤 만나게 되면 숨을 쉬는 일조차 힘겹게 느껴진다.


정오는 해가 가장 높이 떠 있는 시간이다. 가장 빛나야 할 순간이면서 동시에 살아온 만큼 살아가야 할 날이 여전히 남아 있는 시기이다. 자신이라는 생명에 대한 예의로 힘을 내 겨우 살아왔는데,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다. 오롯이 자신 스스로 버텨내야 함을 알기 때문에 ‘고독한’ 시간이라고 표현되었다. 미화된 삶이 아니라 적나라하게 그 바탕을 드러낸 생에 대해 이미 고민해 볼만큼 고된 시간이었다.


삶의 문제들은 결국 자신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나’가 할 수 있는 선택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유예의 시간을 갖고자 남몰래 바닷가에 갔다. 바다가 아니라 바닷가라는 표현에 주목해본다. 바라보는 대상으로서 바다를 경험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바닷가는 경계이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 생과 사의 경계, 나는 그 경계에서 유예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주변인들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숱한 경험으로 생의 고독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을 자연의 일부라고 여기고, 자연의 이치와 우주의 흐름 따라 내맡기고자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 앞에 나아갔다.

아무도 없는 겨울의 빈 바닷가
머리 풀고 흐느껴 우는
안타까운 파도의 울음소리
인간은 왜 비루하고 외로운 것인가

그곳에도 역시 사람은 없다. 겨울이라는 계절이 주는 것은 차가운 공기에 대한 감각보다는 여름 바다에 대한 대비(對比)로써 사람들이 떠나고 남은 자리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빈 바닷가에서 ‘나’는 또다시 철저히 고독한 존재가 된다. 관계성 속에서의 고독이기도 하지만, ‘나’의 안에서 희망이 빠져나가고 그곳에 절망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나’의 상황을 나타내기도 한다.


파도의 소리가 들려온다. 파도는 이 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의 절망을 해소하고자 바다로 갔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온 것도 파도의 소리이며, 최종의 메시지를 전하는 매개도 파도가 된다. 파도는 밀려오기도 하며 밀려가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에 의해, 그리고 거대한 흐름에 의해 소리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울부짖는 소리로, 때로는 귀를 기울여야만 겨우 들리는 작은 소리로. 운명의 바다에 던져진 인간이 숙명에 의해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신음을 내는 것과 같다.


그런 파도도 울고 있었다. 흐느껴 울고 있었다. 마음 놓고 목놓아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흐느껴 울고 있기에 더 애처롭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있는 힘을 다해할 만큼 해 보았음에도 변하는 것이 없을 때,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것 같지 않을 때, 숙명의 굴레가 그 끝도 없이 돌아가고 있을 때, 그러나 나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되는 때에는 크게 소리를 내어 울 힘조차 없다. ‘나’는 그 울음소리의 의미를 잘 알기에 안타까움이 크다.


파도의 울음이 나의 울음과 다르지 않음을 ‘나’는 알아차린다. ‘나’ 역시도 머리 풀고 넋 놓은 채로 울어본 경험이 있다. 나를 이곳으로 이끈 내 생의 세 번째의 절망이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지 짐작할 수 있는 표현이 나온다. 나와 다르지 않은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 안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한다. 인간은 왜 비루하고 외로운 것인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풀 수 없었던 물음이다. 어떠한 사건이 나를 비루하고 외롭게 만들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울려야 하고
마침내 못 다 채운 가슴을 안고
우리는 서로 왜 헤어져야 하는가

나를 이곳 바닷가로 이끈 것, 나에게 세 번째의 절망을 안겨준 것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여러 의미로 전달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이 나오고 서로 헤어졌다는 표현을 볼 때 아마도 개인과 개인의 사랑을 말하는 듯하다.
사랑은 사랑을 하는 주체로서의 나와 그 대상이 되는 객체로서의 그가 있어야만 성립되는 관계이다. 사랑은 통합의 관계이다. 나와 상대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하나가 되는 느낌,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느껴지다가 어느새 내가 느끼는 것과 상대가 느끼는 것이 누구의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 지어지지 않기도 한다.


이미 사랑을 경험한 후의 헤어짐이란 아플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진정 사랑이었다면, 헤어짐은 너와 나의 분리가 아니라 나와 나의 일부분의 분리이기 때문이다. 이미 나의 일부로 변해버린, 그래서 이제는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진 상태에서의 분리이기 때문이다. 통합된 후 분리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안겨준다.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열망과 달리 헤어져야만 하는 환경에 속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계가 성립되기 전부터 예상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맺은 사랑일 수도 있고, 뜻하지 않은 환경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나’가 그 이유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나의 일부로 여길 만큼 깊이 통합되어있던 대상이 우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상대의 행복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무력감은 자신이 속한 인간이라는 개체를 비루하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회의(懷疑)를 넘어 운명에 대한 분개를 안고 ‘나’는 바닷가에 갔다. 나의 생활공간 안에서는 답을 찾지 못하고 바다로 갔다는 것은 나의 사랑이 사회적 용인의 범주 내에 있지 않을 수도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

작은 몸뚱이 하나 감출 수 없는
어느 절벽 끝에 서면
인간은 외로운 孤兒
바다는 모로 누워
잠들지 못하는 가슴을 안고 한밤 내 운다

나는 절벽 끝에 섰다. 한 발 디디면 그곳은 내가 서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물질로 이루어진 바다이다. 바다에는 바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가 되는 바닷가도 있다. 보통은 그 경계가 바다와 육지의 연속성 상에 위치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분절을 나타내는 지점인 절벽도 존재한다. 땅을 걷다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바다를 맞닥뜨리게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나’는 그곳에 절벽이 있음을 알고 자의적으로 찾아간 듯하다.


사랑을 지킬 수 없어 미약하게 느껴진 자아는 어느새 ‘작은 몸뚱이’가 되어 있다. ‘나’는 내가 너무 부끄럽지만 그렇게 작아진 나조차도 감출 곳이 없는 어느 절벽 끝에서 나는 나를 마주해야만 한다.
사랑했던 상대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자책, 그렇게 만든 사회에 대한 원망이 한데 섞인 채로 절벽 위에 섰다. 내가 살아온 터전과는 전혀 다른 물질로 이루어진 또 다른 세상과의 경계인 절벽 위에 서 있다.부터 온 곳도 알지 못하겠고,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음을 절감한다.


존재의 비루함과 외로움을 토로하다가 이제는 인간이 그저 고아에 지나지 않음을 참회(慙悔)한다. 발버둥을 쳐보아도 소용이 없음을, 한계를 깨닫고 웅크린 채 운다. 파도치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바다도 마찬가지다. 그 파도마저도 스스로의 움직임이 아니라 어디에서인가부터 밀려오는 거대한 물결에 의해서, 바람에 의해서 흔들리는 일밖에는 할 수 없는 바다도 마찬가지다. 큰 파도가 잦아들고 난 이후에는 언제 또다시 거대한 운명이 밀려올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다.


잠들지도 못하고 그 두려움을 끌어안은 채 한밤 내 우는 바다의 모습이 ‘나’에게는 낯설지 않다. 인간 존재의 한계를 깨닫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는 것밖에 없었다. 파도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바다처럼.

너를 울린 곡절도, 사랑의 업보도
한데 섞어 눈물지으면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아픔도
허허 몰아쳐 웃어버리는 바다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상대와 그 사랑을 주고받는 일은 세상의 모든 감정을 경험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생명의 탄생에서부터 소멸에 이르기까지의 총체와 같이 하나의 사랑이 싹터서 불씨가 꺼지는 시간까지는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마음을 모두 채우지도 못하고 헤어져야만 하는 사랑이라면,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의 밀도는 더욱 높을 수밖에 없다. 이별의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무력한 존재임을 알아차리고 한밤 내 울고 난 이후 몸에서 긴장이 사라지고 나니, 그 사랑의 모든 과정이 절벽 위에서 떠오른다.


그리고 저 아래 바다를 바라보니 제 역시 그러한 과정을 거쳐보아 아는 듯이 파도로 응답한다. 허허, 웃어버린다는 표현에서 절벽 끝에 섰을 때부터 최고조로 달했던 시적 긴장은 풀어진다. 이전 연에서는 파도의 소리가 울음소리로 들리더니 이번에는 웃음소리로 들린다. 나의 감정 상태나 긴장의 정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사랑은 고도에 깜박이는 등불로
조용히 흔들리다
조개껍질 속에 고이는
한 줌 노을 같은 終焉인가

시선의 변화가 두드러지는 구절이다. 고도에서부터 모래사장의 조개껍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고, 얼마나 깊은 마음을 쏟았을까. 잡을 수 없을 만큼 존재를 넘어선 높이에서 내게 빛을 주기도 하고, 주지 않기도 하며, 꺼질 듯 말 듯 한 아슬함 속에 나는 올려다보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해는 저물어 노을이 지고 나는 고개를 떨군다. 그곳에는 내가 손만 내밀면 잡을 수 있는 조개껍질이 있었다. 그러나 조개껍질은 스스로 빛을 내지는 않는다. 저 노을의 빛이 반사되어 빛날 뿐이다. 역시 그곳에도 실체는 없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감정을 증명하려 애쓰는 것이 사랑의 과정이기도 하다. 무에서 생겨났으나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인데, 형태는 없다. 때로는 의심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안심을 하기도 한다.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상대가 보내고 있는 것이 제대로 전달된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내 삶을 때로는 밝혔다가 때로는 어둡히다가 한결같음 없이 뒤흔든다. 눈을 떠보면 나는 여기 있지만 빛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이후이다. 그 쓸쓸함과 무상함이 손에서 스르르 느껴지는 듯하다.
 
몸뚱이보다 무거운 절망을 안고
어느 절벽 끝에 서면
내 가슴 벽에 몰아와 허옇게 부서져 가는 파돗소리......

몸뚱이보다 무거운 절망의 무게감은 어느 정도일까. 그 절망이 얼마나 무거웠으면 몸뚱이보다 무겁다고 표현했을까. 아마도 존재를 넘어서는 무게감 이리.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움은 당연하고, 나는 아마도 그 절망에 눌려 존재감이 소멸되기 직전일 것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절망이든, 삶에서 경험한 또 다른 주제의 절망이든, 그것이 몸뚱이보다 무겁게 느껴진다면 나는 죽을힘을 다해 숨을 쉬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 무게는 나를 땅속으로 꺼지도록 만들 것만 같고, 떨치려 해도 나를 따라다녀 선택의 여지가 얼마 없는 상태이다.


근근이 무거운 절망을 안고 여기, 절벽까지 왔다. 그 절벽에 서고 보니 몸뚱이 하나 감출 수 없는데, 그 몸뚱이에는 자신보다 무거운 절망이 덤으로 업혀 있다. 절벽까지 오기도 힘들었다. 이 시에서 가장 힘이 빠져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어 있는 구절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절벽에 서서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나의 결심이 맞냐고, 마지막 메시지를 기다리는 상황이다. 과연 어떤 응답을 받게 될지 독자의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나’는 어떤 답을 원하고 있을까, ‘나’가 바라는 답은 무엇일까. 이번의 파도는 울음이나 웃음으로 응답하지 않고, 메시지를 싣고 오는 매개가 된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아직은 더욱 뜨겁게 포옹하라
바다는 내게 속삭이며
마지막 구석까지 채우고 싶어
출렁이며 출렁이며 밀려오고 있었다.

그와의 사랑으로 다 채우지 못한 ‘나’의 가슴에 파도가 밀려온다. 여기에 서 있지 말고 돌아가라고 한다.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은 사랑으로 인한 절망인데, 돌아가서 다시 또 사랑을 하라고 한다. 동일한 대상을 상대로 하는 것인지, 새로운 상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바다는 내게 ‘아직은’ 포기하기가 이르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포기인지 역시 알 수 없다. 헤어져야만 하는 사랑에 대한 포기를 말하는 것인지 생에 대한 포기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우리의 운명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를 향해 밀려온다. 그렇기 때문에 거부하기가 어렵다. 그 운명이 나의 저항을 만나게 되면 운명은 절망을 낳는다. 그렇게 절망이 쌓여가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 대하여 멈추어 서서 생각한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힘겹게 만드는지. 때로는 사랑의 이름으로 때로는 건강의 이름으로 어떠한 주제로든 구체적인 상관물을 통해 운명은 절망이라는 덩어리를 우리의 삶 속에 던져 놓는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절망의 덩어리까지고 굴려 가면서 살아내야 하는 것이 삶이다.


‘나’는 세 번째의 절망을 만났을 때,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물결 앞에서 답을 찾고자 바다를 찾았다. 한바탕 울고서 기진맥진된 상태로 파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더니 아직은 아니라고, 돌아가서 더욱 뜨겁게 운명을 껴안으라 한다. 그런 바다에서 ‘나’는 나를 향한 사랑을 느꼈다. 사랑으로 미처 다 채우지 못한 내 가슴을 뜨겁게 포옹하려 큰 사랑이 밀려오고 있음을 느낀다. ‘나’가 원한 것이 어떤 답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지막 구절에서 ‘나’의 안도를 느낄 수 있다. 버림받지 않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낀다.


이 시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바닷가 절벽에 섰다가 돌아온 여정을 통해 그리고 있다. 살아가다 보면, 마음속 바다의 절벽 위에 설 때가 때로 있다. 떨칠 수 없는 숙명의 그림자가 그곳까지 찾아와 나를 끌어내리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같이 잘 살아보라는 것인지 아직 너를 놓아줄 수 없다고 더 힘든 삶을 느껴보라고 하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결국은 스스로 포기하고 절벽 아래로 꾸역꾸역 내려오게 된다.


만약 저 아래에서 아직은 아니라고 돌아가 뜨거운 삶을 한 번 만 더 살아보라고, 힘내라고 속삭여준다면, 운명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감사의 마음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한 메시지를 담은 파도의 소리는 다양한 형태로 다가온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사랑으로, 때로는 소망했던 작은 꿈의 실현으로, 그러므로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아직은 포기하지 말라는 신호를 잘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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