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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Oct 29. 2023

티스푼 다루듯 막삽으로 흙 뜨는 여자

일기

1.

몸의 실루엣을 드러내는 기백이 넘는 블랙 원피스에 쟈켓을 걸치고 행사장에서 마이크 잡고 오프닝을 그럴듯하게 열어놓고는 단 몇 시간 만에 맨발로 추리닝에 목장갑 끼고

삽질을 하는 내가 사랑스러운 건지 자랑스러운 건지

오늘따라 인증샷을 찍다가

이건 뭐 호텔 애프터눈티세트도 아니고 무성한 잡초 토핑으로 얹어진  흙더미 삽으로 떠 사진을 찍나 싶다가도

불현듯 장자가 생각나며 그래, 나는 막삽을 티스푼처럼 다루는 여자라며 혼자 즐거워했다.

 

2.

그렇게 잡초가 밉기만 하더니 하늘이 높은 가을이라 그런가 막삽도 티스푼처럼 다룰 줄 아는 여자라 그런가 마음이 여유로워져 잡초의 생명력을 배워보기로, 어디 한 줌의 흙만 있어도 뿌리를 내리는 그 생명력을 보며 나도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남아보기로.


3.

잡초를 여러 해 뽑아보며 드는 생각은 힘없는 자들일 수록 연대해야 한다고. 잡초 한 둘 뽑기는 쉬운데 얽히고 설킨 뿌리들은 뽑아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들에게 연대의 힘을 배웠다.


4.

관리한다는 것, 가꾼다는 것. 대학 때 검은 가죽 가방을 들었는데 자취방에 보관하다 어느 날 보니 곰팡이가 핀 것을 보고 무언가를 가질 자격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관리할 능력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 후로 나에게 물욕은 조금도 집고 들어올 틈이 없게 되었다. 비에 흘러온 토사로 시멘트 포장길에 흙이 쌓이고 쌓이다가 풀들이 뿌리를 내리고 잡초가 무성한 흙길이 되어버린 후에야 길을 찾으려 하니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에 처음  쓸려온 조금의 흙을 치워야 했다. 다음 비에 흘러온 흙이 그 위에 자리 잡기 전에 치워야 했다. 몇 번의 비가 더 내리고 다음으로 미루기만 하던 유실토들이  마치 그곳이 처음부터 자기네들이 있던 곳인 양 흙길을 만들기 전에 치워야 했다. 시멘트 바닥 위 흙 위에 뿌리내린 잡초들과 무더기 흙을 퍼내면서 생각했다. 마음의 밭에도 우울이 커지기 전에 작게 올라올 때 즐기려 하지 말고 그때그때 비질로 쓸어주어야 마음 밭이 유지되는 거라고. 마음에 잘못 자리 잡는 잡초의 씨앗들을 하나 둘 저들 마음대로 커가게 두다 보면 나중에는 손쓰기 어려워진다고. 미루지 말고 부지런히 마음의 밭을 쓸고 치우며 가꾸어야 한다고. 보기 좋은 꽃밭은 거저 생기는 게 아니라고.


5.

흙을 파는 것이면 삽질이 한결 수월할 텐데 시멘트길 위로 자갈이 있고 그 자갈 사이사이로 잡초무더기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황이라 걷어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급기야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민소매 런닝만 입고 삽질을 하다가 이 우스꽝스럽고 야만적이고 아름답지만 슬픈 장면을 남편이 내다보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감집 사위 감철에 감 한 번 따지 않는 것에 대해서 길 한 번 쓸지 않는 것에 대해서 원망을 가져본 일이 없다. 일 시키면 농장에 가지 말자 할까 봐 밭에 나가 된장찌개에 넣을 고추 따오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내가 하는 삽질 소리에 자기가 일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며 마음 불편하게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무슨 일을 저리하나 싶어 창밖으로 이 모습을 볼까 봐 걱정했는데 물 마시러 들어서니 코를 골며 자는 모습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다.

 

6.

심봉사 눈뜨게 인당수에 뛰어든 심청이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전래동화가 아닌 대국민 가스라이팅. 마이크를 잡고 부모의 삶과 자신의 삶을 분리해야 한다, 심리적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무대 위에서는 말하겠지만 마이크를 놓자마자 그날도 농장에 와 나는 삽질을 할 테지만 그리고 이거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분리하려 하지 않겠지만 무대 위에서는 그리 말하겠지.


7.

혼자 이런저런 위로를 하다가 수학을 잘하기 때문에 삽을 넣을 때의 각도도 잘 안다는 생각에 미치자 다니던 대학 지하철 역 앞에 있던 칼국수집 사장님 초등학생 아이를 과외했던 때가 그리워졌다. 나는 어렸고 사장님 내외분은 따뜻하고 정겨운 분들이셨다. 언제나 환대해 주셨기에 고단한 타지 생활에 과외하러 갈 때가 휴식 같은 시간이었다. 전라도 분들이셨는데 잘 지내시는지, 아이는 얼마나 컸는지 궁금해졌다.


우리 아부지 편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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