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전: 사랑을 갈망했던 한 남자, 그에게 여자란
짧게 관람한 전시에 대한 얕은 생각
by Om asatoma Jul 22. 2024
관계를 지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
여성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졌던, 잘 생긴 남자의 이야기.
남녀가 하나의 작품에 등장할 때
주로 여성들은 정면을 바라보고 남성은 측면 또는 그림자와 유사한 형태로 일그러지게 표현이 되고 있으며
여성의 표정이나 실루엣이 비교적 선명한 형태로 표현되는 반면
여성은 주변과 함께 뭉개진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
여성이 밝음의 영역에 있다면 남성은 어둠의 영역에 있다는 점들이
자신에게 여성의 존재가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단지 여체를 향한 욕망이 아니라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기고 싶을 때의 유아적 욕망, 유아기의 욕망에서 발현한 것이어서
결코 외설적으로 보이지 않으며 때로 안쓰럽기까지 하다.
꽤 잘 생긴 남자 뭉크가 여성을 향하는 것에
여성들도 처음에는 끌렸을지 모르나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뭉크가 지향하는 것이
모성에 의한 받아들여짐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성인 여성들은 흥미가 떨어졌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성인 남자를 원하지만 뭉크는 성인의 몸은 가졌으나 관계의 지향은 성인-성인 간 만남이 아니라 성인여성-유아 또는 아동기 남성의 만남이었다면 여성들의 외면이 일견 이해가 되기도 한다.
어머니를 4세 때 여의고 어머니처럼 자신을 돌보아준 누이가 10대 후반에 세상을 떠났다면,
뭉크는 이미 강력하게 단절된 관계를 경험하였을 것이며
이처럼 의미 있는 여성들과의 관계 단절은 세상 또는 자신의 일생과의 단절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를 회복하기 위한 여성들과의 관계를 지향하여도 그들에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일정한 부성- 돌봐짐에 대한 경험-을 기대하게 마련이지만 뭉크에게 느껴지는 내면의 미성숙함이, 유아기적 집착으로 나타났을는지도 모르겠다.
뭉크에게 집착한 여인 툴라가 뭉크와의 결혼을 원했을 때, 뭉크는 결혼을 미루기만 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랐지만 뭉크에게 결혼과 가정을 갖는다는 것, 특히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남편 또는 아버지의 역할은 뭉크에게 전혀 준비되지 않은 사회적 역할이었기에 두려웠을 것이다.
툴라가 뭉크와 헤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툴라의 이성 편력이나 뭉크에 대한 사랑의 진정성, 깊이 까지 의심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민 여성에게 결혼을 한다는 것,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단지 한 남자에게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인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성을 발현시키고자 하는 유전적 의지에 의한 강렬한 욕구일 수 있다. 뭉크에 대한 사랑도 진심이었을 것이고, 다른 이와의 빠른 결혼은 결혼이라는 이슈 자체로 툴라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문제였을 것이다.
오랜 기간 사귀다가 헤어진 연인들 중 이별의 시점으로부터 멀지 않은 시점에 다른 이와 결혼하는 경우들은 여성 또는 남성에게 하나의 존재로서 타인에게 인정받는 사랑을 넘어서 새로운 생명의 잉태에 기여하고 생산적인 인류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의 사랑을 부정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여성은
사랑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배하는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작품 속 남성들은 대부분 그림자 같은 검은 옷을 입고 있고 측면 또는 뒷모습이며 팔과 다리 동작의 움직임은 없고 얼굴의 표정이 없다.
여성은 빛과 빛으로 인한 색의 영역에 있고
남성은 어둠과 빛에 의해 만들어진 그림자의 영역에 있다.
여성에 대하여서는 여성 존재의 가치를 분명하게 알았으나
남성-자신에 대하여서는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다.
존재의 이유를 공고히 하는 데는 '엄마'와 같이 긴밀하게 연관된 애정을 주고받는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엄마'로부터 지지받은 경험이 결핍된 뭉크에게 여성은 모성 추구의 연장에 있을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순수한 슬픔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사라짐, 갑작스러운 사라짐, 떠나감, 자신을 버리고 떠나감. 버림받음. 갑작스러운 영원한 이별.
그것이 뭉크가 만난 첫 여성과의 만남의 결과였다. 이후 만나게 되는 어떠한 관계들, 특히 여성들과의 만남에서 이별 또는 분리는 공포스럽게 내면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 <키스>가 보여주는 일체감은 남녀의 에로티시즘으로서 육체적 합일이 아니라 엄마의 품에 안긴 아이로서, 더 나아가 모체가 품고 있던 태중의 태아로서 환 귀하고 자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키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성욕의 대상으로 타자를 욕망하는 격렬한 몸짓이 아니라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커다란 아기 같은 모습으로 안겨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엄마의 존재는 사실 유아기 때를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다시는 찾아볼 수 없다. (뭉크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만약 그와 같은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신일 것이다.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모성을 향한 갈망이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이성의 군상이 표현될 때 여성이 전면에 배치되며 사람들의 표정이 기괴하다. 표정은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겉으로 드러난 형태이다. 주로 대상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더욱 미세한 근육을 사용해 가며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는 노력을 한다. 표정이 없는 사람들은 상호관계를 스스로 차단하거나 억압하거나 실제로 관계 맺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을 확률이 높다. 뭉크에 의한 표정의 표현은 아마도 유년기 '엄마'와의 상호관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괴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그가 이른 나이에 엄마를 잃었다면,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애정으로 바라봐주는 누군가의 얼굴을 본 적이 있을까? 그러한 대상을 향해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을 담아 표정을 지어본 적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표정을 잃어 갔을 것이고, 작품 속에 표현되는 인물들의 표정 역시 그 정도로 밖에 표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초상화 작품 중에서 편안하게 테이블에 앉아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 앉아잇는 중년의 여성을 그린 작품이 있었는데, 아마도 뭉크는 그 작품을 그리면서 깊은 감정이 소용돌이쳤을 것이라 짐작하고, 정성을 기울여 완성해 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덧붙여 그 기괴한 표정들은 아니, 표정이 없는 인물들은 행복할 자격, '나는 행복해도 되는가', '나만 행복해서 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그에 대한 자신의 결론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본다.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가까운 사람들의 질병과 고통과 죽음들 사이에서 홀로 미소 짓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동안 어쩌면 평생 가족들이 병사한 이후 홀로 남아 행복 또는 어떠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죄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표정을 지을 수 없는 삶을 살고, 그의 작품 속 인물들에도 반영이 된 게 아닐까. 기괴한 표정 또는 눈은 있으되 입의 형태가 없거나 얼굴 근육의 일부분이 없는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작품 속 빛의 요소는 햇빛에 의한 밝음이 아닌
주로 달빛에 의해 제시된다.
밤시간이 주는 음울이 있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열망한다는 것,
그 안에서 희망을 가지려 했다는 점들이 그를 비극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비록 대표작이 THE SCREAM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뭉크전 큐레이팅을 다시 한다면
사랑을 갈망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하겠다.
존재를 긍정받고 싶어 했던 기나긴 여정,
여성성이 가진 거대한 무게감이 한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방황하고 떠도는 서로가 서로를 안아주자고,
강력한 사랑의 힘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전시라고.
전시 초반부의 작품 '마주 앉아서(in the digs)'를 보자마자
그에게 연락했다. 전시보다 그와 마주 앉는 일이 더 중요한 것 같아서. (그리고 그를 만났다.)
한 시간 남짓 미술에 대한 지식 없이 직관으로 훑듯이 관람한 후기. 아무런 근거 없이 마음대로 씀.
전시도 서울에서 하는 전시는 더 좋더라고요..
예술의 전당도 근사하고..
마침 비 갠 날 서울 나들이 다녀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