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멋진 사람이 되어야겠다, 상대들을 다시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존재만으로 꿈꾸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 사람 더 늘어났다..
이제하.
문학과지성사 시집 표지에 작가의 캐리커쳐를 대부분 이제하 님이 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지금으로서는' '택도 없지만' '문학과지성사'에서 '시집'을 내고 싶다는,
오로지 이제하님이 그려주실 캐리커쳐를 위하여,
그에 의한 나의 표현, 그가 나를 어떻게 표현할까에 대한 궁금증으로!
J의 초상
이 여자를 사랑한 것이 틀림없다. 전시장에 여자가 있었다. 우아하고 기품 있고 살결도 희고 보드라운 그림같이 세련된 여인이었다. 목소리에서는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어떤 욕망도 열망도 없이 맑고 청아한 모습이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와 같이 아름다울 수는 없어 보였다. 현실의 공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역의 기억
그에게 구름은 정형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는 구름을 바람으로 흩어지는 비정형의 객체로 표현하지 않는다. 명확히 구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개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하나의 현상으로서 구름을 명명하지 않는다. 그의 구름에서 보이는 비교적 뚜렷한 선과 깊이감이 느껴지는 입체감, 그리고 작품 전체를 압도하는 빛과 선명한 채도를 통해 그가 구름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 수 있다.
시계의 이미지 역시 여러 작품에서 등장하는데 모든 것에는 흘러온 역사가 있다는 맥락에서의 시계인지, 시계를 통해 의지 또는 의식을 불러 넣는 것인지, 생의 유한성을 의미하는지, 흘러옴과는 별개로 현재에 집중하자는 호소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인물들 뒤로 깔린 철로는 원근이 분명한 지향을 보인다.
바람에 날린 치맛단, 비바람을 막기 위해 얼굴을 감싼 스카프, 견고한 우산을 쓴 준비된 여인의 한쪽 발은 철로 위를 딛고 있다.
흘러왔으며 또 어딘가로 향하겠지만 모든 인물들은 현재에 굳은 두 발을 딛고 있다. 두 발로 땅을 굳게 디딘 이미지 또한 이제하 작품의 주요 요소이다. 의지, 확고한 자유의지의 표현으로 읽겠다. 무엇에 의해서도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오로지 주체로서의 자유의지. 인물에서 손의 형상은 생략될 지언정 발은 비교적 분명하게 표현된 것 또한 그의 작품에서 주의깊게 살펴볼 요소이다.
구름의 초상
구름의 초상이라 이름 붙인 두 개의 작품이다. 흐르는 것을 붙잡아두고 무엇을 읽으려 했던 것일까?
좌측의 작품에서와 같이 구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또는 구름을 향해 연결되는 흰 연기 형태의 띠 역시 작품의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작품 안에서 이곳과 저곳의 연결, 주체와 객체, 대상과 대상, 시간과 공간의 연결이라 읽을 수 있겠다. 더불어 작품 내에서의 운동성, 흐름, 율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흔들림 없이 수직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에도 주의해본다. 외부-공기의 흐름에 의한 흔들림이 없는 것, 정형의 물체가 아닌 기체의 형태임에도 흔들림이 없는 것에서 정지된 장면임을 상상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형태를 보이는 구름 이미지에 이어, 흩어지지 않고자 하는 작가의 지향으로 읽겠다.
저 대는 뒤이어 나올 소녀의 손에 잡혀있던 대가 아닌가!
중미산 문필봉
작가를 압도한 것은 구름이다.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수렴되어 있는 구름의 형태, 저 자리에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오히려 산이 나무가 인가가 잠시 머물다 떠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작품이다.
모든 작품들이 대체로 갈색과 붉은색 푸른색 위주의 낮은 채도였다면 오직 구름에게서만 빛이 허락되는 모습을 보인다.
구름이 다른 형태로 제시되는 하나의 작품이 있었다. <항>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는데 아마도 작품의 창작 시기가 노년이거나 또는 다른 작품들과는 멀리 떨어진 다른 시기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하늘에 자리잡은 분명한 형태가 아니라 바다의 저편에 존재할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개의 구름들이 혼재되어 있는, 또렷한 수평선에 그 자리를 내어준 구름이다. 바다에 밀려나고 있는 구름이다.
소년과 말
구름이 흘러내려 소년 옆의 상자에 쌓이고 있다. 상자로부터 피어올라가는 것인지 저 상자가 끌어당기는 것인지 아직은 알지 못하겠다.저 상자 역시 여러 작품에 나타난다. 때로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때로는 닫힌 형태의 상자들이다. <역의 기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 밖의 말
남자가 있는 공간의 안쪽에 시계가 등장한다. 문을 사이에 두고 문 안에 남자가 서 있으며 문 바로 앞에 말이 있다. 그리고 말보다 더 바깥쪽에서 화폭을 등진 채 문 안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상자도 문 바로 앞에 놓여있다. 문을 열고 있는 순간이 아니라 문을 연 채 정지되어 있는 어느 시점의 표현이다. 문을 연 채, 문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문을 더 열 지 다시 닫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남자가 내부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말 역시도 문 바깥에 서서 이쪽을 향해 선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 남자의 시선과 말의 시선이 모두 여자에 머무른다. 제목은 <문 밖의 말>이지만 저 그림의 주인공은 여자다. 여자의 등장으로 인한 긴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실내의 말
말이 들어왔다. 여전히 공간의 안쪽에는 시계가 있고 세 시를 가리킨다. 새벽 세 시 일 수도 있겠으나 하늘의 푸른 빛이 언뜻 보인다. 말이 등장하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역동적인 선이 돋보인다. 긴 머리의 여성은 속이 비칠 듯 얇은 실크를 걸치고 말을 향하고 있으며 말은 고개를 돌리고 뒷걸음질 치는 형상이다. 공간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아직 준비되지는 않은 상태로 보인다. 그러나 말은 고개만 돌렸을 뿐 몸은 돌리지 않은 모습이다.
남자와 말
소년과 말에서는 말이 흰 빛을 띠었는데 남자와 말에서는 푸른 말이 되어있다.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하는 동안 흰 말이 푸른 말이 되었다. 푸른색의 욕동의 내포 또는 세계의 확장쯤으로 읽기로 했다. 머리를 긁적이는 듯 팔을 들어 올린 남자의 뒷모습과 개를 비스듬히 내리고 서 있는 푸른 말의 다소곳한 모습. <구름의 초상>에서도 본 것과 같이 구름이 등장하는데 그 형태가 하늘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모양이다. 움직임, 율동, 변화의 표현이라고 읽겠다.
망아지를 데리러 가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듯한 신부와 남자. 의아한 것은 남자의 발의 형태를 보았을 때 남자는 앞모습인 것 같고, 여성은 허리선과 치맛자락의 흐름을 볼 때 뒷모습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는 말이 필요했을 것이다. 여기에 있지 않기에 데리러 가야 했을 것이다.
저 바다로
그동안 말이 등장하는 공간은 모두 건물의 내부였다. 문 밖에 있기도 했지만 문의 바깥일뿐 실내의 공간이 주가 되는 구도였기에 벽이 없는 공간에서의 말은 제시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말은 어느 해변에 있다. 말에게도 남자에게도 움직임은 보이지만 발의 형상이 분명하지 않다. -다른 작품들에서는 발이 분명한 형태로 제시된다. 땅을 굳게 딛고 서 있는 모양이다- 하늘과 바다와 백사장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혹은 그래서 자유로워 보이는 두 주체, 그동안 이 둘이 각각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었다면 이번 작품에서 둘은 서로 떨어져 있는 다른 형태이기는 하나 그 정신적 영역은 이미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벽이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여유가 부여되기도 했다.
실내의 말
벽과 천장이 있는 붉은 공간이다. 말과 인물은 그 공간을 가득 채워버렸다. 공간이 모두 담을 수 없는 허용치를 벗어난 느낌이다. 문도 창문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인물의 오른손에 새 한 마리가 앉아있다. 이제 자유로울 때가 되지 않았을까? 자유를 혀용 하거나 허용받아도 될 만한 순간이 왔다. 인물의 성별은 분명치 않으나 몸의 실루엣이나 다리의 모양을 보았을 때 여성인 듯하다. 벗어날 의지가 없는 갇힌 공간에 찾아온 한 여성, 새의 자유를 알려주며 유혹하고 있으나 이 유혹이라는 것은 단지 에로시즘적인 의미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이 창작된 년도가궁금하다.
휴식
여인도 앉아있고 말도 엎드려있다. 양쪽이 모두 엉덩이와 발을, 바닥에 붙이면 양쪽 모두 합의된 휴식이 이루어진다. 동정을 연상에 바치지 않았을까. 말은 흰색이며, 여인의 옷은 푸른색이다. 그 이상은 덧붙이지 않겠다.
노랑 쟈켓
작품들 중에 노란색을 처음 보았다 노란색이 좋았을까 쟈켓이 맘에 들었을까 두 손을 모두 머리 뒤로 올려든 자세가 마음에 들었을까
전시된 작품들 중에 유일하게 천만 원이라고 메모가 되어 있던 작품. 아무에게도 팔 수 없을만큼 소중하다는 뜻인지.
경쾌한 여성을 만난 듯.
대를 잡은 소녀
이제 막 봉긋 가슴이 솟으려는 소녀다. 팔에 힘이 들어가 있다. 손이 강조되어 있다. 잔뜩 화가 난 모양이다. 앉아있지만 손에는 막대가 잡혀있다. 막대는 실물일 수도 있겠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또는 무엇을 공격하기 위한 이미지처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어설 수 없는 상황이다. 행동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표현을 하고 있다. 무엇이 소녀를 화나게 했을까.
푸른 목도리
앞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는데, 대를 잡은 소녀가 커서 푸른 목도리를 한 여인이 된 게 아닐까 생각할 만큼 두 인물은 얼굴의 모습과 이미지가 매우 닮아있다.앞서 언급한푸른 색의 이미지를 생각했을 때, 소녀에서 여인으로의 변화를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가자미와 소녀
다리가 있는 동물 중에 역동성을 표현하기 가장 좋은 동물은 말이며, 다리가 없는 동물 중에는 물고기가 아닐까 싶다. 물고기가 물을 벗어났을 때 살고자 바둥치는 모습. 그러나 그림 속의 물고기들은 얌전히, 심지어 안기어 있다. 오른쪽의 작품은 <가자미와 소녀>이다.
남자는, 남자다.
그에게 표현된 말은 야생성의 표현이자 자유에의 의지이지만 그 야생성 또는 야성성이 결코 과장되지 않게 표현되고 있기에 오히려 유약함이 강조된다. 기대를 깨뜨리고 거칠지 않게 표현됨으로써 남성안의 소년이 강조된다. 이러한 의외성은 성인 남성으로부터 모성을 자극하게 하는 요소로 작동한다.
그에게 여성과 남성은 대립의 이미지나 종속의 이미지가 아니며 조화를 이루어 공존하는 관계로 그려진다. 뭉크에게 여성이라는 존재가 자신-남성을 압도하는 존재로서 트라우마가 투영된 것이라면 이제하에게 여성은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게 해주는 성장과 성숙의 조력자로서 병립하는 존재로 그려진다고 보겠다.
전시장 입구에 열람할 수 있게 전시된 그의 책들을 잠시 살폈을 때 얼핏본 몇 줄의 글을 통해 그의 동성애에 관한 관심을 볼 수 있었다. 여성-여성 간 동성애에 관한 주제였다. 남성의 대척점에 여성을 놓아두지 않았다. 탐구의 대상이기도 하고 자기 존재의 완성을 향한 여정의 동행자이기도 하다.
일방적으로 홀로 거친 야생성을 배제함으로써 아마도 많은 여성의 선택을 받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