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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m asatoma Sep 08. 2024

제주. 비 내리는 비자림, 그곳에서

20240907


어제 하루가 숲의 날이었다면
오늘 하루는 바다의 날로 정했다. 그랬었다.

성산으로부터 해안도로를 따라 세화로 올라오면서,
바다색을 온전히 보고 싶어 창문 열고 달리며 땀이 흐르기는 했지만
세 면 모두 바다를 향해 창이 난 멋들어진 풍광의 '비수기애호가(카페이름)'에 앉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여행의 마지막 날은 여유롭게 바닷가 카페에서 쉬기로 했다. 그랬었다.


카페 안의 사람들은 비 내리는 제주바다에 작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그때부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비자림관리사무소에 전화해 그곳에도 비가 오냐고 물었다.
잠시의 먹구름 소나기 같은데 비자림에 비가 오지 않는다면 계획한 시간들이 아쉬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제, 충분히 걸었다. 오후 네시에 들어가 폐장하는 시간까지, 관광객들이 하나둘 돌아가기 시작한 시간 고요한 숲길을 걸었다. 신발을 벗고 지기를 담뿍 느끼면서 걸었다. 걷다가 눈 맞은 나무가 있으면 가만 멈추어 서서 발아래 땅 아래까지 뻗어왔을 그 나무의 뿌리로 전해지는 에너지를 온기를 맨발로 맨발로 충분히 느껴가며 걸었다.

관광객들이 돌아가고 저녁이 찾아오는 그 시간 나무들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밤의 정령을 맞을 준비를 하는 듯했다. 새의 울음소리도 기대에 차있었다. 그 수령을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의 이미 신령이 된듯한 나무들 앞에서는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말을 걸고 말을 걸고 말을 걸고 어렴풋한 답을 들었다. 그렇게 충분히 걸었다. 입맞춤보다 더 강한 전율이 흘렀다. 맨발을 내어주고 맨 마음을 내어줬다.

그런데 오늘, 비가 왔다! 비 내리는 비자림이라니...! 제주의 일기 예보를 보고 비 내릴 때 맞추어 오고 싶을 정도였는데 십여분 거리에 비 내리는 비자림이 있다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바다가 졌다. 숲이 이겼다. 얼마나, 얼마나 심장이 뛰었는지 모른다.

비자림이다. 돌아가는 사람들도 보였고 아직은 약한 빗줄기라 우산 없이 입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접이식 우산을 챙겼고 벗은 운동화 넣을 비닐봉지를 챙겼다. 심장이 뛸 뿐 아니라 몸도 떨릴 만큼 무척 상기되었다.  
초입부는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맨발로 걸을 만했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촉감, 비가 내려 잎에 가지에 바닥에 닿는 모습들, 타닥이는 빗소리, 숲내음 모든 것이 동시에 자극되었다. 그 환상의 숲에서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아- 미칠 거 같애'를 삼백 번쯤 과장하면 천 번 내뱉었다.  

점점 빗줄기가 강해졌고, 폭우처럼 쏟아졌다. 맨발로 느끼기에는 오히려 비가 오지 않는 날 살짝 촉촉한 정도일 때가 보들보들한 감촉으로 발을 감싼다. 곳곳에 물이 고여 첨벙일 정도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끝까지 간 거다. 옷이 흠뻑 젖어 몸에 감길 정도가 되었다. 관광객들만 없으면 옷을...이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캐리어에 갈아입을 옷이 있었기에 더 마음 편히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앞뒤를 둘러보아도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는 발바닥과 손바닥을 동시에 땅에 대고 당신들이 버텨온 그 시간의 에너지를 전해달라고 당신들의 뿌리에 나의 미약한 뿌리를 얽어달라고 내가 걷는 길아래까지 뻗어있을 그 뿌리들을 상상하며 빌었다. 어쩔 수 없이 몸이 웅크려지고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는 자세였다.

오늘은 비가 쏟아져 빗물에 씻긴 나무의 뿌리들이 길 위로 보이기 시작했다. 불쑥 내민 손 같이, 누구의 맨 어깨, 맨  등 같이 맨질맨질 맨 몸처럼 그러나 비장하지는 않게 마치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래서 비를 불렀다는 듯이 따뜻이 내민 손이었다. 그 자리에 멈춰 발맞춤하였다. 아무에게도 내어준 적 없는 나의 맨 살이다. 옆에 고여있는 빗물에 흙 뭍은 발을 씻어내고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굵직한 그 뿌리에 발을 대었다. 땅 위로 드러난 뿌리 부분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천천히 더듬었다. 몸을 섞고 있는 것처럼 맨몸으로 껴안긴 듯이 그에 매달려 호흡을 다듬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서있었다.

모든 나무들이 나와 눈 맞추어줌이 느껴졌다. 걷는 곳마다 모든, 모든 나무들이 나를 향해 서서 팔을 벌려 환영하며 맞이함이 느껴졌다. 미소 지으며 바라보기도 하고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그 숲에서 환대받는 작은 영혼으로 어떤 기쁨이 넘쳐왔다. 세찬 비가 쏟아지는 그 숲 한가운데 혼자 서 있으며 충분한 교감을 나누고자 했다.

일정한 때가 되자 벅차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때마침 우비를 입은 사람들이 한둘씩 짝을 지어 오기 시작했다. 한 무리의 외국인 관광객들이 참새떼처럼 즐거워하며 영어로 지저귄다. 분명 좋았는데 좋기는 했는데 혼자 그대로 있다가는... 그 숲 속 어린 나무가 되어 다시 나오지 못할 것도 같았다. 진한 사랑의 끝을 경험한 것 같은 기분.

그 숲, 세찬 비가 내리던 그 숲, 관광객 없이 혼자 멈춰서 있던 그 숲에서 모든 나무들이 끌어안아 주었다. 그들의 포옹 그들의 배웅을 받느라 걸음이 빠를 수 없었다. 그 시간 제주의 다른 곳에는 비기 오지 않았으니 나를 이곳으로 이끌기 위해 나무들이 먹구름을 부르지 않았나, 먹구름도 우리를 위해 힘껏 비를 뿌려주지 않았나,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을 만큼 비자림 밖으로 나오자 곧이어 하늘이 말개지고 비가 그쳤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신묘한 경험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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