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Om asatoma
Oct 04. 2024
집도 좋지만, 혼자 있는 집도 좋지만, 이 건조한 공기와 파란 하늘과 초가을의 햇살에는 성산아트홀의 커피가 어울린다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누구를 만날 것도 아니면서 머리카락이 건조해 보일까 헤어로션을 바르고 그것으로도 성에 안 차는지 헤어 오일을 덧발랐다. 스스로 윤기가 나는 곳은 이제 단 한 곳만 남았다.
구찌의 덜큰한 향수를 마구 뿌려대고 현관을 나서려는데 타관대출 신청했던 도서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그 남자다!
그래, 이런 날 만나기에 좋지. 성산아트홀 정도면 괜찮아. 갑자기 두근댄다. 만나야 할 사람 만나러 가는 것처럼. 그 밤 보았던 남자의 눈빛과 음성이 생생하다. 아직 갇히지 않은, 순수와 야생이 섞여있던, 인간에 대한 애정이 아주 조금 엿보였던, 가볍지 않은, 음성에서 풀냄새가 났다. 대금소리, 그가 있는 공간의 배경으로 대금소리가 들렸다.
2년 전 출판된, 현재는 절판되어 구입처가 없는, 창원시내도서관사업소 중에서는 단 한 곳_상남도서관에만 한 권 있는 그 시집을 조수석에 태웠다.
표제시를 시집의 제목으로 했다. 그 시 제목의 일부에는 헤세의 책명이 들어가 있다. 그 책은, 많은 고전들 중에서 나에게 특별한 책이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때로 선물로도 주었던 책이다. 이미 그와 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 듯했다. 우리가 하나로 만나는 지점을 확인했다.
날개의 숙명이라니, 숙명이라니... 펑펑 울려버린, 시가 몇 편 있었다. 그 작품들의 시선이 따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비장해서, 누군가 나를 보고 한 스케치 같아서, 내가 뱉어야 할 말을 대신 뱉어 놓은 것 같아서 눈물을 흐릴 수밖에 없는 작품들이다. 16, 19, 24, 26, 28, 32, 36, 77, 92.
그리고 100쪽의 마지막 구절.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를 읽을 때 몰입도가 가장 높았고, 4부의 마지막 시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시집의 마지막 부분의 해설은 아쉬웠다. 안타까웠다. 시조시인이자 평론가라는 사람이 쓴 글이었는데, 평론처럼 쓴다고 평론이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글이었다. 요즘 시집에 있는 해설들_평론을 보는 일이 왕왕 있는데, 평론이라는 글의 속성이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 시인에 대한 평론은 시인의 매력도를 떨어뜨려버리는 무척 안타까운 경우에 속한다. 그래야만 했는지는 나 같은 사람이 모르는 바다.
그런 날이 올 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가 내 글을 보게 되는 날이 오면 그와 내가 즐겨 쓰는 단어와 표현들 중에 일치하는 부분이 많음을 그도 아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밤, 그도 나를 보았을까. 그도 나를 보았을까.
그에게 나는, 그에게 나는,
나도 그에게 읽힐 수 있을까, 읽힐 날이 올까.
시인의 이름도, 시집의 제목도, 작품의 제목도 밝히지 못하면서..
그의 글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의 곁을 스치는 한 조각 운석이라도 되고 싶다.
작년에 정년퇴직을 했다 하는데
글이 이렇게 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