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강내유(外剛內柔)
운곡
-단단함이 품고 있는 부드러움-
I. 외유내강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처세의 필요성
우리는 오랫동안 “외유내강(外柔內剛)”을 이상적인 처세의 미덕으로 배워왔다. 겉은 부드럽고 속은 굳세어야 한다는 전통적 가르침은 세상과의 화합을 통한 조화를 지향했다.
그러나 인생의 굽이 길을 지나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
겉이 지나치게 유순하면, 세상의 날 선 손길은 너무 쉽게 문턱을 넘고 내면의 평화를 침범하며 원하지 않는 입장을 강요받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과 요구에 쉽게 무너지는 관계 피로의 시대 속에서, 이제 우리에게는 자신을 효과적으로 지켜낼 새로운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부당함에 굴하지 않는 윤리적 완고함으로 자신을 지키고, 그 안에서 진정한 다정함을 키워가는 현대인의 실용적 지혜'로 역설적인 “외강내유(外剛內柔)”를 제안해본다.
II. 强(강)과 剛(강)의 구분: 윤리적 완고함으로써의 '剛'
고전에서 말하는 강함은 “强(강)” 과 “剛(강)”으로 나뉜다.
强(강)이 상대를 굴복시키고 사익을 관철하는 외향적 폭압이라면, 剛(강)은 스스로를 지키고 내면의 가치를 수호하는 내향적 기개다.
타인의 감정을 조종하거나 폭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强이라면, 剛은 내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아니요'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자존감의 힘이다.
예컨대
옛 군사정권의 억압이 强이라면, 그에 굴하지 않고 민주를 지켜낸 힘은 剛인 것이다.
외강내유의 ‘강(剛)’은 사익을 위한 폭압이 아니라 부당한 힘에 굴복하지 않기 위한 윤리적 완고 함이다.
겉에 剛 한 기개를 지닌 사람은 아무리 强 한 사람일지라도 함부로 다가설 수 없는 경계를 지니며, 그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나 침범을 예방하고 언제나 자신의 몫을 지켜낸다.
III. 剛 한 껍질 속 부드러운 생명: '內柔'의 선택적 개방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단단함을 지닌 이들이 실은 뜻밖의 다정함과 수줍음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단단한 껍질 속 씨앗이 실은 가장 부드러운 생명을 품듯,
외강내유의 강(剛) 한 껍질은 불필요한 관계의 소음을 걷어내는 최소한의 방어막이다.
이 단단함은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그 안에 보존된 유(柔) 함을 오직 신뢰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에게만 내어주는 '선택적 개방'의 지혜가 된다.
그들의 단단함은 진정한 관계에 집중하기 위한 절제된 선택이었으며, 윤리 의식이 결여된 强 함과는 태생부터 다른 剛 함인 것이다.
세상을 살며 깨닫게 된 것은, 겉이 剛 한 사람일수록 내면 깊은 곳에 부드러움이 살고, 반대로 겉이 지나치게 柔 한 이들 중엔 내면까지 유약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IV. 전장(戰場)에서 발견한 실존적 '剛'
이 깨달음은 나의 삶에도 깊게 새겨져 있다. 젊은 시절, 월남전 이후 최대 규모의 국군 해외파병이었던 이라크 평화재건 부대의 임무에 민간인 신분으로 참여해 자이툰 사단과 함께 약 4년을 보낸 적이 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과 전쟁 중이었다.
한국군은 비교적 안전지대라는 아르빌(Arbil)에 주둔했으나
그 안전은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종잇장 같은 경계였다.
모든 장병이 완전무장 상태로 경계를 섰고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실제로 한국군 주둔지 인근 철책 부근에 미사일이 떨어진 적도 있었으며, 주둔지와 직선거리 불과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폭탄 트럭이 터져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했었다.
폭발과 동시에 검은 버섯구름이 솟구쳐 오르고 사무실 유리창은 요란하게 흔들렸다.
공기마저 진동하던 그 순간의 공포는 지금도 나의 몸 한구석이 기억한다.
당시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인 김선일 피랍·살해 사건 또한 바로 그 땅에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죽음은 일상 곁에 도사리고 있었고 생존은 의무였다..
공기마저 진동하던 그 순간의 긴장 속에서, 전장(戰場)의 군인들이 보여준 강인한 표정은 공격성이 아니라 삶을 지키기 위한 결의였고, 전우를 지키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그 강인한 겉모습(外剛)은 스스로와 타인의 생명을 지키는 방어 기제였으며, 그 안에는 반드시 살아 돌아가 가족과 전우를 다시 만날 부드러운 소망(內柔)이 담겨 있었다.
그 침묵과 절제 속에서 알게 되었다. 진정한 강함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위에서 책임을 선택하는 것임을.
훗날 국군의 최고 지휘관 현역 4성 장군 합참의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국가의 안위와 5천만 국민을 적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그야말로 '강한 남자'의 정점에 서 있는 그는 담소 중 의외로 아내에게 꼼짝 못 한다고 고백해 좌중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순간, 강철의 틈새에 스며든 인간적인 빛이 얼마나 따뜻하고 유연한지를 느꼈다.
V. 외강내유: 자기 경계를 세우는 현대인의 지혜
강(剛)’과 ‘유(柔)’란 결국 힘의 문제를 넘어, 삶을 대하는 정신적 태도의 차이일 것이다.
외유내강(外柔內剛) 이 세상과의 화합을 통한 조화를 지향하는 전통적 미덕이었다면, 외강내유(外剛內柔)는 자기 경계'를 명확히 세워 세상과의 거리를 설정하고 내면의 평화와 성숙을 도모하는 현대인의 가장 실용적이고 윤리적인 생존 지혜인 것이다.
지금은 내 안의 剛 한 기개를 세워, 세상의 불필요한 소음으로부터 상처받기 쉬운 가장 부드러운 내면의 나를 지켜낼 때가 아닐까.
운곡
긴 세월의 내공을 껴안고, 삶의 무늬를 또 다른 언어로 그려 내려고 고민합니다. 가슴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지나온 날들의 바람 소리, 잊히지 않는 얼굴들, 그리고 아직도 풀리지 않은 질문들을 물결로 엮어 실개천에 조용히 흘려보내고 싶습니다.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한 줄 한 줄의 문장들이 바람처럼 스치고, 별빛처럼 가슴 깊은 곳에 내려앉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