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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프레도박 Dec 31. 2017

러빙 빈센트 반 고흐 #03

03화 밀레의 그림보다 훨씬 비싼 그림

빈센트의 그림은 밀레의 그림보다 훨씬 비싸게 거래되었다. 왜 그랬을까? 빈센트의 한쪽 팔을 턱에 괴고 있는 가셰 박사의 초상화는 1990년 8,250만 달러에 경매되었다. 1897년 57달러였던 가격을 감안하면 154배 오른 것이다. 빈센트는 밀레의 그림을 대상으로 많은 습작을 그리고 그의 편지에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왜 그의 그림은 그가 그 당시 존경했던 밀레의 그림보다 현재 더 비싼 가격으로 경매장에서 거래되었는가? 그 원인은 그의 그림 특징과 그의 삶에 있을 것이다. 그의 삶에서 삶에 대한 철학에서 그의 그림의 특징이 나오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의 특징은 크게 3가지로 대상이 주로 서민이라는 점, 인간에 대한 따듯한 시선과  강렬한 붓터치와 그만의 색채에 있다. 


그의 그림을 보다 보면 우선 그림의 대상은 바로 서민이다. 서민을 대상으로 했던 화가는 빈센트가 유일한 화가는 아니다. 그 당시 유명한 화가가 바로 밀레다. 밀레의 만종이라는 그림은 60, 70년대 한국의 이발소나 중국 요리 집에 가면 벽면을 장식했던 그림이다. 빈센트의 그림 대상은 화려한 파티의 장면도 아니고 아주 곱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여인도 아니고 특별한 정치적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의 그림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은 바로 자기의 우울증을 치료해주려고 해던 가 셰라는 우울증 치료 의사이다.  빈센트는 자기가 하숙하던 집주인과 부인과 흔히 보이던 꽃과 정원과 나무를 그렸다. 물론 풍경화도 있다. 10년이라는 짧은 화가 생활에서 처음에 그린 그림도 강렬한 노란색과 코발트색를 사용한 그림도 모두 인간의 따듯한 심성을 바탕으로 자세히 바라본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라는 시처럼 아주 자세히 관찰하면서 그린 것이다. 나무를 그릴 때는 그 나무의 밑 뚱을 무릎을 끊고 기어 다니면서 탐구했다고 한다. 그 걸 본 사람들은 아마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빈센트가 아를에 있을 때 가장 멋진 그림을 그렸지만 정작 아를에서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다시피 했고 파리의 아를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 한 점도 없다는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는 또 다른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강렬한 색상이라기보다는 우선적으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사랑이다. 아래 편지글을 통해 빈센트의 그림의 특징을 유출할 수 있다. 

1880년 7월 편지글
“해방은 뒤늦게야 오는 법이다. 그동안 당연하게 든 부당하게 든 손상된 명성, 가난, 불우한 환경, 역경 등이 그를 죄수로 만든다. 이 감옥이란 편견, 오해, 치명적인 무지, 의심, 거짓 겸손 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 감옥을 없애는 게 뭔지 아니? 깊고 참된 사랑이다.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최상의 가치이며, 그 마술적 힘이 감옥의 문을 열어준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것과 같다. 사랑이 다시 살아나는 곳에서 인생도 다시 태어난다.”

 그 당시 서민들의 어려운 생활과 희망을 그대로 그린 작가는 빈센트 반 고흐뿐만은 아니다. 하지만 빈센트는 깊고 참된 사랑을 통해서만 해방이 온다고 깊이 믿었던 것이다. 빈센트가 살았던 시대는 산업혁명의 시대로 기계로 생산한 직물이 직조공이 직접 짜던 직물보다도 더 쌌던 시기로 서민에게는 매우 힘든 시기였다. 19세 후반부터 인간의 동력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직업은 기계로 대체되었다. 그 당시 직조공의 벌이는 가족이 먹기에 충분한 감자를 구입하기에도 힘든 시기였다. 그래서는 직물을 짜는 직조공을 대상으로 그림을 여러 점 그렸다. 그의 그림에는 항상 상징주의의 그림처럼 하나의 희망이 들어있다. 예를 들어 직조공을 그린 그림에는 어린 아기가 한 명 유모차에 타서 직조공인 아버지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아기를 그림으로써 노동자가 마음에 품었던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그림을 예로 들면 ‘종달새가 있는 보리밭’ 그림에서는 그림 가운데 날아가고 있는 한 마리의 종달새를 그려 놓았다.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 시인은 <쉴레 지언의 직조공>을 통해 사회의 현실에 대한 격정을 표현했다. 이 시를 읽고 빈센트의 그림을 본다면 그림의 대한 느낌이 한 층 더 고조될 것이다. 쉴레 지언은 1844년 직조공들의 폭동이 일어난 지역 이름이다. 이 당시 쉴레 지언 직조공의 생활은 영국 노동자보다 훨씬 열악했다고 한다.

<쉴레 지언의 직조공>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말랐다.  
그들은 베틀에 앉아 이를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덜커덩 덜커덩 우리는 짠다.

하나의 저주는 신에게
추위와 굶주림에 떨면서 매달렸는데도
우리의 기대는 헛되었고 무자비하게도
신은 우리를 우롱했고 바보 취급을 했다.
덜커덩 덜커덩 우리는 짠다.
하나의 저주는 부자들의 왕에게
그는 우리들의 불행에는 눈 하나 깜빡 않고
마지막 한 푼마저 훔쳐 갔다.
그리고 개처럼 우리들을 사살했다.
덜커덩 덜커덩 우리는 짠다 <중략>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의 세 번째 특징은 그림으로만 본다면 그만의 강렬한 붓터치와 색채에 있다. 빈센트의 화려하고 강렬한 색상은 프랑스의 아를이라는 지방에서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시작한다. 프랑스의 남부지방의 화려한 빛깔과 경치에 반한 것이다. 그만의 독특한 덧칠하는 파레스토 기법으로 그 자신만의 그림의 길을 개척한 것이다. 


 최근 한국의 드라마, 화장품, 댄싱가수, 남대문 시장의 액세서리들이 동남아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분야는 정말로 창의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 부분이 동남아에서 경쟁력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남아의 서민들이 좋아하는 한국인 만의 색채가 있는 제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화장품의 경우는 한국의 화장법을 중국에서 많이 따라 한다고 한다. 서양인의 화장법보다는 같은 동남아의 화장법이 동남아인들에게 맞기 때문인 것이다. 아시다시피 중국으로 가는 공항에서 흔히 보는  광경이 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인들이 남대문 시장 등이나 면세 백화점에서 구매한 화장품의 포장지를 뜯어내고 여행용 백에 빽빽이 담는 광경이다. 한국의 다른 제품도 동남아 시장에서 승승장구하기 위해서는 한국인만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해서 고흐처럼 자신의 색채를 갖어야만 한다.   


  *그림출처: 반고흐뮤지엄 네덜란드, https://www.vangoghmuseum.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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