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이예지 양
아빠 어릴 적에는 집에 TV가 한 대뿐이었다.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없을 때다. 네가 좋아하는 만화를 아빠도 네 나이 때 좋아했지만 할머니가 드라마를 보면 못 봤다. 그런 할머니조차 할아버지가 야구를 보면 드라마를 못 봤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없을 때 드라마를 보던 할머니가 꾸벅꾸벅 졸며 고개를 떨구는 모습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다. 할머니 손에 있던 리모컨은 반쯤 흘러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엄마와 가정을 이루면서도 집에 TV는 한 대였다. 대신 컴퓨터가 있고 각자 스마트폰도 쓰게 됐다. 굳이 TV가 아니더라도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는 세상에서 리모컨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었다. 그래도 큰 화면이 제공하는 만족이 있는데 엄마는 드라마를 볼 때만큼은 그 느낌을 온전히 누리고자 했다. 물론 아빠는 그런 감상을 무작정 방해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 TV 앞에서 스마트폰을 보는 엄마 옆에 리모컨이 방치됐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네가 자라는 동안에도 집에 TV는 한 대다. 컴퓨터가 있고 스마트폰과 태블릿도 쓰는 엄마와 아빠는 굳이 TV마저 독점하지 않았다. 엄마 드라마 시청 시간과 네 만화 시청 시간이 겹치지 않았기에 리모컨을 두고 갈등을 빚을 일도 없었다. 아빠가 채널권을 행사했던 이유는 네가 TV와 먼 곳에서 인형과 블록을 만지며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손에서 빠져나가는 리모컨을 다시 움켜쥐며 눈을 번쩍 떴다. 보고 있는데 뭐 하느냐며 버럭했다. 엄마는 리모컨 쪽으로 다가가는 아빠를 제지했다. 보는 중이고 지금은 봤던 부분이며 곧 보지 못한 대목이 나온다고 예고했다. 너는 어느새 인형과 블록을 옆으로 밀어둔 채 보고 있는데 왜 그러냐며 울먹였다. 삼대에 걸쳐서 도대체 이게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