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에 대한 인간의 태도

뒤틀려진 소유욕

by 약속의 땅

나는 종종 나무 앞에 멈춰 선다.

나무의 뒤틀림이 빛을 향한 생의 몸부림의 결과라는 사실이 존경스럽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굽히고 또 굽혀 뒤틀어버린 시간의 무게가 스며있기에 나무의 뒤틀림은 경의롭다.

뒤틀린 한 그루의 나무가 저토록 아름다운 또 다른 이유는 그 나무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아니기에 훼손할 수 없고, 가지를 자를 수 없으며, 다만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나무의 뒤틀림의 수고를 감상할 뿐이다.

소유가 없는 사랑은 그래서 조용하고 깊다.


그런데 인간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 든다. 특히 가장 깊은 사랑이라 불리는 관계에서조차—이를테면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그 순수하고 맑은 애정이 어느 순간부터 방향을

바꾼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 아래, 자식의 삶을 계획하고, 통제하며, 때로는 대리 만족의 도구로 삼는다.

뒤틀려진 소유욕이 작동한 것이다.

아이는 ‘내가 낳았기에 나의 것’이 되어버리고,

그 순간 아이의 삶은 부모의 궤도 위에 놓인다.


하지만 생명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부모조차 자식을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이 땅에 우연히 찾아온 존재를, 잠시 돌보고, 이끌 뿐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그랬듯이...

창작물도 마찬가지다.

한 편의 글, 한 곡의 음악, 한 장의 그림은 창작자가 낳은 자식과도 같다. 고요한 마음속에서 오래 품고,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지나며 세상 밖으로 조심스럽게 내보낸 하나의 생명. 그건 나무가 빛을 보기 위해 스스로 뒤틀어 버린 고통과도 같다.

그런데 우리는 그 생명을 너무 쉽게 소유하려고 한다.

출처 없이 글을 복사하고, 허락 없이 이미지를 퍼 나르고, 대가 없이 음악을 듣는다.

좋으니까, 예쁘니까, 듣고 싶으니까. 마치 ‘사랑하니까 괜찮아’라고 말하는 부모처럼.


하지만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자유를 보장해 주는 일이어야 한다.

자연을 무분별하게 개발하면 생태계가 무너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듯이 창작물을 함부로 다루면 창작의 숲이 사라진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자식을 과도하게 통제하면 영혼이 위축되듯, 창작자가 보호받지 못하면 언어는 굳고, 새로운 표현은 태어나지못할 것이다.


그래서 저작권은

법 이전에 ‘태도’라고 생각한다.

어떤 존재를 '내 것'이라 말하지 않고, 그 존재가 태어난 이유를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태도.

우리는 자연을 소유할 수 없다.

자식도, 창작물도 마찬가지다.

모두 제 나름의 숨결과 방향성을 가진 생명이다. 그 생명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감탄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감상자가 될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낯선 생명을 품는 일이다.

창작은 그런 낯설고 불안정한 것들을 말없이 키워내는 과정이다. 그 모든 창작자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명예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조용한 존중이다.

사랑하니까 소중히 다루는 일.

좋아하니까 허락을 구하는 일.

그게 우리가 자연 앞에서 배운 예의다.


그리고 창작 앞에서도

마땅히 지켜야 할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