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달리기 창고_과신의 대가

몸과 머리의 협상

by 약속의 땅

달리기를 하다가 문득 깨닫게 된 것 중 하나가 있다.

바로 내가 ‘깨달음을 반복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깨닫지만 이내 잊고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발전인지 망각인지 모를 반복들을 통해서 하찮은 내 모습을 본다.


어제 10km를 편하게 뛰었다고 오늘도 편할 거란 보장은 없다.
알다가도 모를 몸. 그래서 컨디션이란 말을 쓴다.
컨디션이라는 말엔 여러 가지가 담겨 있는데
잠을 몇 시간 잤는지, 뭘 먹었는지, 그날의 기온, 습도,

햇살, 기분, 사소한 짜증까지
이 모든 게 내 몸뚱이 하나에 시시콜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오늘도 잘 뛸 거라는 자신감은 어제의 유령과도 같다.
그 유령이 어제 내 발목을 잡았다.


지난주, 나는 잘 뛴 러너였다.
21km의 트레일런도 달렸고, 5km의 가뿐함, 8km의 적당함도 달렸다.
그래서 어제는 좀 길게 달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쯤 되면 사람이 욕심을 부리게 된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욕심이

몸은 가만히 있으라 하는데 자존심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든다.


나는 새로운 길로 뛰어보고자 머릿속으로 코스를 설계했다.

내 최애 장소인 신정호수를 지나, 꽤나 길고 가파른 경사를 지닌 갱티고개를 넘어,
송악저수지까지... 그리고 호수를 돌아 다시 고개를 넘어

신정호로 돌아오는 약 22-23km짜리 코스를 떠올렸다.

이 정도면 오후 근무 시간 전에 충분히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이다.

달릴 준비는 끝이 났고 힘차게 두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 가지 간과 한 정보를 떠올렸다.
날씨였다. 날씨가 협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기온은 30도에 가까웠고 습도는 거의 수중 달리기 수준이었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딱 5km 지점에서 느낌이 왔다.
'아, 오늘...날을 잘못 골랐다.'


이제 협상의 시간이다.
계속 갈 것인가, 돌아설 것인가.
머리와 몸의 자존심 사이에 협상 테이블이 차려진다.
협상의 결과는 몸이 가져갔다.


10km 지점에 편의점이 있으니, 거기서 이온음료 한 병이면 된다며
머리를 설득하고 다시 달린다.

이런 협상은 늘 짧고, 결과는 뻔했다.


저수지를 지나, 숲길에 접어드니 바람이 시원했다.

예전엔 그냥 임도였으나 황톳길로 변해버린 운치 있는 길이다.
더위에 급방전 되어가는 몸뚱이를 끌고 겨우 길의 아름다움을 엿보며 달린다.

그 길의 끝 지점에 편의점이 나타났고 물과 음료로 더위를 달랜다.

절반의 거리에서 잠시 망설이지만 가던 길을 가기로 했다.

머리는 계속해서 밀어붙인다.


그리고 얼마 후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초행길의 호수 동편길.

인적이 드문 길. 그곳은 닦여진 길도 아니고 사람의 오랜 발로 만들어진 오솔길도 아니었다.

그 보다 더 거친 길들 과 낙타등 같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이다.
장르가 갑자기 변경되었다. 로드러닝에서 트레일러닝으로...


머리는 돌아갈 수 도 없는 위치에 스스로를 멈춰 세웠다.

내가 요청하지 않은 변화에 몸은 묵묵히 적응해 가야 한다.

첫 번째 협상을 다시 생각했다. 후회가 치밀고 올라온다.

몸이 따지기 시작한다. 이게 뭐냐고…


그래도 풍경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볼 틈이 없었다. 난 지금 풍경을 볼 눈이 없다.
숨 쉬기도 바쁘다.


길고 긴 거친 숲길을 겨우 빠져나와

다시 아스팔트로 나온다.

잠시 멈춰 선다. 버스 정류장 뜨거운 벤치에 앉아 생각에 생각을 더 한다.

이제 남은 거리는 7~8km...

문제는 체력도, 물도, 심지어 주변에 편의점도 없다는 거였다.

또다시 협상이 시작된다.

이번엔 나와 현실 사이의 협상이다.
나는 포켓 속에 있는 카드를 확인한다.
다행이다. 문명의 힘, 카드 한 장. 카카오택시 호출.

당당한 택시런을 선택했다.


에어컨 바람에 얼굴이 식어가고
나는 말없이 창밖을 본다. 고개를 끄덕인다.
아쉽지만 현명한 선택이었다. 달리기와 오후 출근 사이에서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다.

늦어진 시간들, 더위로 꺾인 체력, 가면 가겠지만 여러 가지

책임질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었다.

포기는 했으나 적절한 포기였다.

그렇게 나는 과신의 대가를 지불했다.


가끔은
의욕이 과신과 손을 잡고 동맹을 이룰 때가 있다.
둘은 좋은 콤비처럼 나를 데리고 엉뚱한 길로 데려간다.

그 결과가 바로 스트라바 어플에 기록된 ‘이상하게 짧은 14km’.
목표는 23km 정도였는데 기록은 도중에 끊겼다.

과신의 성적표다.

러닝도, 인생도

그날의 몸을 살펴야 한다.
그날의 상황을 읽어야 한다.
컨디션, 시간, 코스, 기온, 습도,
그리고 머리와 몸의 적절한 타협도 필요하다.

어느 하나의 소리로 지나치게 기울면

과욕을 맞이하게 된다.


지금 내가
달릴 수 있는 사람인지, 쉬어야 하는 사람인지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괜한 자신감으로 먼 길을 떠났다가는

중간에 택시를 타게 된다.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자주 그럴 순 없다.

이렇게 가끔 땀으로 배우는 것들이 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넘어지고, 지치고, 택시도 타보아야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

내 상황을 냉정하게 봐야 과신은 자신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러닝은
자신감과 과욕 사이에서 자신을 보게 만든다.

포기하지 않는 법이 아니라 포기할 줄 아는 법도 가르쳐 준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조금 더 러너가 되어간다.

어쩌면 이 깨달음을 또 망각하고 택시를 타게 될 수도 있다.

이것도 자신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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