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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앤비 Aug 03. 2020

엄마, 나 아파요

현 재난에 관한 한 기사를 접하며

이러한 분들과 제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마음으로 이웃의 아픔에 함께 동참하고자 하는 분들

소중한 아들을 잃어본 하나님의 심령을 함께 묵상하기 원하시는 분들




경북 경산의 17세 고3 남학생이라 했다. 고등학교 첫 해에는 반장, 그다음 해에는 부반장을 지낸 바르고 성실한 이라 했다. 그의 아버지는 직장암 3기 환자였다. 근치적 수술 후 항문의 역할을 대신하는 장루를 안고 사는지 항암치료를 아직 진행하고 있는지 알려진 것은 없으나, 그의 삶의 질은 현저히 떨어졌을 것이다. 기저질환자와 고령 위주로 사망자가 속출하는 터라 학생 아버지는 건강에 각별히 유념했을 것이다. 개학 날짜는 연기된 상태였다. 학생은 지난 삼주 동안 아버지가 운영하는 학원에 한차례 방문한 것 외에 외출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혈기왕성한 남학생이 삼주가 넘는 시간 동안 외출을 자제한 것은 암을 앓고 계신 아버지의 건강을 위한 바른 배려라 여겨진다.  


2020. 3.10 화요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대구 파견 마지막 날이었기에 난 그날의 대부분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른 오전부터 비가 쏟아졌고, 강풍도 끊임없이 불었다. 아주 낮은 온도는 아니었지만 멈출 줄 모르는 비와 바람이 모두의 하루를 고되게 만들었다. 3.9부터 마스크 5부제가 시행되었기에, 3.10 화요일은 출생연도 끝자리가 2 혹은 7로 끝나는 이들이 마스크를 구매할 수 있던 날이었다. 그날 오후 5시, 학생은 생명과 같은 마스크를 구입하기 위해 집 근처 한 약국을 찾았다. 줄이 길었다. 많이 길었다. 사람이 어찌나 많던지, 학생은 한 시간 가량 줄을 서 마스크 두 개를 겨우 구입했다. 그것도 비바람이 치던 으슬으슬 한 날. 시간이 가며 그는 분명 추위에 떨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 밤, 학생은 발열 증상을 호소했다. 부모는 집에 있는 감기약을 먹였으나 열이 하루 이틀 동안 내리지 않았다. 체온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응급실을 바로 찾을 만한 심한 고열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하튼 하루 이틀 감기약을 먹으며 경과 관찰하기로 했지만, 증상이 호전되지 않자 이틀 뒤 3.12 오후 6시쯤 학생은 어머니와 함께 경산 중앙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 41.5도의 충분히 염려될만한 수준의 고열이 확인되었지만, 선별 진료소가 이미 닫아 해열제와 항생제만 처방받았을 뿐 코로나 검사는 다음날 미뤄야 했다. 결국 다음날 3.13 오전, 같은 선별 진료소를 찾아 코로나 검사와 폐 x-ray 촬영을 했고, 폐 염증 소견을 들었지만 의사는 더 센 약을 처방해주고 귀가시켰다. 


그럼에도 증세가 나아지지 않자 어머니는 그날 오후 4시쯤 병원에 다시 전화했다. 아이는 이제 호흡부전까지 호소한다. 병원에서는 상급병원으로 가기 위한 소견서를 써주겠다며 소환했고, 그렇게 학생은 3차 병원인 영남대학병원으로 이송됐다. 입원하여 격리병실에 들어서던 아들이 힘겹게 부모에게 말을 건넸다.


“엄마, 나 아파요”


그것이 아들의 유언이 되어 버렸다. 소중한 아들의 완치 판정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부모가 듣는 아들의 마지막 목소리가 돼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폐렴의 원인을 코로나 바이러스로 강력히 의심하던 터라, 부모는 격리되는 아들과 동행할 수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고인은 코로나 음성으로 판정되었다). 중증 폐렴 환자가 되어 생사를 다투게 될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보호복으로 무장한 의료진의 뒷모습만 바라보는 것 외에는,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입원 첫날밤 자정, 아들이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어머니는 그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부모는 차 안에서 엿새를 기다렸다. 엿새를 집도 아닌 차 안에서. 부모가 되어본 경험 없는 어느 누구의 미숙한 마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또 괴로워지는 부분이다.


아들은 끝내 사망했다. 사인은 폐렴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부전. 입원 이후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혈액투석과 인공 심폐 장치 등의 치료까지 동원되었지만, 살아 부모 곁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자정 넘어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한 일은 어머니에게 이제 평생의 한이 되었다. 17세 학생이 생에 마지막으로 한 일은, 비 오는 날 약국 앞에서 한 시간 기다려 마스크 두장을 구입한 것이 되어 버렸다. 미래와 꿈 가득했던 그가 이 땅에서 한 최후의 일이 바로 추운 날 마스크를 구입한 것이었다. 


왜 하필 그날은 햇살 한 줄기 없던 흐린 날이었을까. 풍만한 햇살처럼 천진한 미소를 환히 그리고 가득 띠어도 모자랄 꽃조차 피기 이른 나이에. 그렇게 그는 이름도 아닌 ‘17세 사망’ 이란 두 단어로 각종 뉴스와 인기 검색어 차트를 하루 종일 독차지했다. 17이란 숫자가 그를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의 연약함과, 이 사회의 부족함과, 우리가 앞으로 떠안게 될 어떤 상흔을 고발하고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그들이 삶의 잔잔한 일들로 다시 미소 짓기까지 치러내야 할 내적 싸움이 얼마나 클지 생각해 보았다. 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어본 내가 사랑하는 한 신에게 기도했다. 유족을 향한 그분의 위로와 은혜가 가득하길. 아들의 마지막 전화를 받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을 깊이 만져 주시기를. 무엇보다 그 아들의 죽음이 그분의 은혜로 재조명되어 보석과 같이 귀한 의미를 그 부모와 사회에 충만히 전달하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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