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어느 날, 미국 버지니아 주의 한 빨간 지붕의 주택 위로 눈이 내렸다. 모든 것들을 꼼짝달싹 하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는 폭설이 아니었다. 작은 흰 입자가 공기 중에 흩날리다가 없어지는 깃털처럼 가벼운 눈도 아니었다. 그날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아주 견고하면서도 촉감은 부드러운, 특유의 온도로 내 몸과 영혼을 덮었던 난생처음 목격한 눈이었다.
그해 겨울 나는, 고등학교 12학년(한국 학년으로, 고등학교 3학년과 동일하다)의 최고 고민거리인 대학 입시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에서 중학교 2학년 과정을 마친 뒤, 미국에서 살기 시작한 나는, 미국 대학 입시 준비에 발을 동동 구르던 중이었다. 어느 대학교로 가면 좋을지, 어느 과로 지원을 해야 할지, 집과의 거리는 어느 정도가 좋을지, 장학금을 주는 학교는 어디가 있을지, 남녀공학으로 지원하는 게 맞을지 등 너무나도 많은 고민들이 매일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눈이 내린 그 날, 여느 때와 같이 과제를 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MSN 메신저를 켜놓고 있었는데, 엘리사 언니가 온라인이었다. 엘리사 언니는 지난해, 내가 제일 좋아한 과목 중 하나였던 합창단 choir 수업을 통해 알게 된 한국인 언니다.
검은 단발머리에 큰 키를 가진 언니는 알토 파트를 담당했었다. 나는 소프라노였기에 수업이 시작하면 대부분 떨어져서 앉아야 했지만, 음역 파트를 섞어서 수업이 진행되는 날이거나, 수업 도중에 가지는 휴식 시간에는 고목나무에 딱 달라붙어있는 매미처럼 키다리 언니 옆으로 가서 앉았다. 언니와 함께 듣는 과목은 그 과목뿐이었고, 수업 밖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언니였지만, 막연하게 언니들을 좋아했던 나는, 또는 누군가의 동생이고 싶어 했던 나는, 엘리사 언니가 좋았다.
엘리사 언니는 나보다 한 살 위였고, 한 학년 위였다. 내가 11학년을 마친 날, 언니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면서 졸업을 했고, 하늘색 학사모와 졸업가운을 입고 있는 언니를 축하하며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서 언니는 학사과정을 밟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다.
내가 12학년이 되고 고민 덩어리가 내 어깨를 짓누르던 12월의 어느 날, 메신저에서 자주 보지 못했던 언니가 온라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의 한 대학교로 진학해서 성공을 쟁취한 언니라면 나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니, 대학 생활은 어때?”
나는 언니와의 안부인사를 마치고 대학생활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언니는 늘 가지고 있던 쾌활한 톤으로 대학 생활이 매우 즐겁고 만족스럽다고 했다.
“수업은 어렵지 않아?”
제2의 언어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대학교’라는 곳으로 가서 한층 높은 수준의 수업을 들어야만 하는데, 수업을 따라가기 힘든 건 아닌지, 궁금했다. 언니는 재밌게 배우고 있다고 했다. 성적은 다 A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 당시 나에게는 대학 진학이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려워 보였고, 그렇게 어려운 대학이라는 장소에서 “올 에이 (All A’s)”를 받고 있다니, 언니가 엄청 대단해 보였다.
그때 언니가 말했다. “하나님께 A를 달라고 하면, A를 주셔.”
아무렇지 않게, 대수롭지 않게 나에게 건넨 그 문장이 내 뇌리를 강타했다. 아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길래, A 학점을 달라고만 하면 주시는 걸까? 그것도 전과목 다? 나는 의아해하며, 그 말이 진짜냐며, “언니는 좋겠다!”를 연발했다.
엘리사 언니와 함께 보낸 지난해의 시간 가운데, 언니는 내 마음의 문을 수시로 톡톡 두드렸었다. 언니는 차가 있어서 집으로 나를 데려다 주기도 했었는데, 차 안에서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몇 차례 건넨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 집은 불교라며 교회는 가지 않는다며 손사례를 치곤 했다.
채팅방에서의 내 반응이 언니에게 어떠한 시그널이 되었을까, 언니는 언니에게 우수한 성적을 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에 이르기까지 허락하셨다고, 그 죽음과 부활로 인해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된 것이라고. 우리는 죄인이지만 언니를, 그리고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렇게 하신 거라고. 죄 많은 나를, 너무나도 부족한 게 많은 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사랑하신다고.
나는 스크린 앞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거운 눈물만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의 온기를 느꼈고 몸이 매우 가벼워지면서 마치 구름 위로 떠 있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온유하고 친절한 목소리를 가지신 분이구나. 그렇게 몇 분을 컴퓨터 스크린 앞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언니는 볼일이 있어서 메신저에서 나가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난 것 같다고 언니에게 전달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대학생활, 대학입시에 대한 고민에 도움을 받고자 시작한 대화의 창은 꺼지고, 하나님과 나의 새로운 대화가 그날로부터 시작됐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세상. 문을 열고 나오니 하얗게 빛나는 눈이 소복이 쌓인 땅. 또는 하늘. 영원토록 당신과 함께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