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 무엇일까?
이 글은 이런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요
예수의 사랑이 와 닿지 않는 분
진정한 친구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싶은 분
대학 때 잠깐 고시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같이 공부한 친구는 나를 포함해 셋. 일요일 하루를 빼곤 주 6일을 아침부터 밤까지 같이 보내던 사이였다. 매일 아침 8시까지 같은 열람실로 출근해 같이 공부하다가 학생회관에서 이천오백 원짜리 밥도 같이 먹고, 가끔은 오백 원을 더 써서 후식으로 바나나도 사 먹었다. 양치도 같이 하고, 자판기 커피도 같이 마셨다. 열람실에 눈에 띄는 새로운 여학생이 등장하면 같이 설레기도 했다. 가을 야구 시즌에는 딱 5분만, 딱 한 타석만 보자 다짐하고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두 시간 동안 같이 야구를 보기도 했다. 타이거즈가 끝내기 홈런으로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지 않았으면 그 날은 소중한 두 시간을 담장 밖으로 날려버린 죄책감에 잠을 못 이뤘을 거다.
모든 것을 같이 했던 세 친구의 운명이 달라진 건 시험 날이었다. 합격자와 불합격자로 갈라진 잔인한 운명의 날, 나와 친구들은 처음으로 다른 하루를 보냈다. 합격 성적표는 우리 중 가장 독한 집중력의 소유자였던 한 친구의 것이었다. 그 날 저녁, 그 친구는 가족들과 함께 소고기를 먹었다. 불합격자로 분류된 나와 또 다른 친구는 헛헛한 마음을 안고 학교 앞에서 돈가스를 먹었다. 고생했다는 의미로 평소에는 천 원 더 비싸서 잘 안 먹던 왕 돈가스를 시키긴 했다. 한 친구는 행복의 나라로 갔고, 나머지는 아직 고시생이었다.
이 상황에 처한 나는 과연 친구의 행복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나는 기약 없이 내년 시험을 기다려야 하는데, 나와 똑같은 시간을 보냈던 그 친구는 행복하다니…
나는 친구의 행복을 진정으로 기뻐해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내 노력 부족에 대한 수치심, 비교에서 오는 상실감,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의심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돌아보면 정말 처참한 마음 상태였다.
친구의 행복에 마음속 깊이 질투를 숨겨뒀던 그 시절을 지나며, 나는 나를 점검하는 지표를 하나 만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과연 친구를 사랑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나를 친구라고 하셨다. 나와 내 친구들이 모든 일상을 같이 했듯이, 사소한 것부터 나와 같이 하기 원하시는 것을 자주 느낀다. 그러다 결국 당신과 친해지려고 하지도 않던 나라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주셨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친구와 함께 기뻐하지도 못했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예수님은 이 보다 더 클 수 없는 사랑을 나에게 주신 것이 확실하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장 1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