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만 원의 액땜, 그리고 기적을 산 하룻밤

아빠가 내 품에서 다시 아기가 되던 날

by 고백맘



좁은 골목길, 세워진 차를 긁고 말았다. 명백한 내 실수였다.

보험 처리를 하려다 잇따른 사고 이력으로 인한 할증이 겁나

눈물을 머금고 현금 80만 원을 송금했다.

지금 내 형편에 80만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기에 속이 쓰렸지만,


"이걸로 큰 액땜했다 치자"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 말이 씨가 된 걸까, 아니면 어떤 암시였을까.

며칠 뒤,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아빠가 병원 복도에서 넘어져 머리를 꿰매야 한다는 연락이었다.

최근 인지와 보행 능력이 부쩍 떨어져 마음 졸이던 차였다.

다행히 CT상 큰 이상은 없었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빠가 '일시 정지' 되었다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갑자기 말문을 닫고 걷지도 못하게 되셨다.

마치 누군가 아빠의 모든 생체 기능을 '일시 정지' 시켜버린 것만 같았다.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대로 다시 병원으로 모실 것인가,

아니면 오늘 밤만이라도 내가 곁에서 지켜볼 것인가.



정리되지 않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공부방에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내 몸은 이미 천근만근이었다.

하지만 직감이 말을 걸었다.


'지금 병원으로 보내면, 너는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






사르트르는 인생이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했다.


매일의 선택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 듯,

나는 나를 위한 편안함 대신 아빠를 위한 희생을 택했다.

아니,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 딸로서의 본능에 가까운 응답이었다.


그날 밤, '아빠의 엄마'가 되었다.

울고 떼쓰는 다섯 살 무법자에서 이제는 갓난 아기가 되어 있었다.


기저귀를 갈고, 굳어가는 다리를 주물렀다.

불안에 떠는 아빠의 팔짱을 끼고 등을 토닥였다.

15년 전, 20개월간 밤마다 울던 유선이를 달래던

그 나직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속삭였다.


"아빠, 괜찮아요. 여기 우리 집이에요. 제가 있잖아요."


곁에서 지켜보던 딸아이는 말없이 할아버지의 손등을 덮어주었다.

물 한 컵을 떠오고 베개를 고쳐주며,

녀석은 언제나처럼 묵묵히 엄마의 손발이 되어주었다.

뜬눈으로 지새운 긴긴밤, 후회와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내가 맞게 선택한 걸까?',

'내일 공부방 수업은 어떡하지?'


울컥 울음이 터져 나오던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공부방 아이들은 누가 지켜보지 않아도 제 자리에 앉아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지난 5년간 새벽 6시 운동장에서 몸으로 익힌 '자기 주도'의 힘이 아이들의 몸에 배어 있었다.

할아버지 곁을 지키는 딸아이의 모습 위로 내가 아이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겹쳐졌다.



"모든 일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운동으로 시작된 'GET 프로젝트'도 결국 마음 훈련이었다.

내가 가르친 것은 단순한 교과목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었음을,

그리고 그 가르침이 지금 이 절망적인 밤에 나를 떠받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이들을 키운 건 나였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 나를 키우고 구원하는 건 아이들이었다.




새벽이 지나 아침이 밝았을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얼어붙었던 아빠의 신경이 깨어난 듯 아빠가 말씀하셨다.


"대구탕 한 그릇 먹고 싶구나."


스스로 일어나 걷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이 쏟아졌다.

그것은 의술이나 약이 아니었다.

차가운 처방전이 아니라 딸의 체온과 손녀의 온기가 만든 기적이었다.

좋아하시는 대구탕을 든든히 대접해 다시 병원으로 모셔다드리는 길,


문득 며칠 전의 80만 원이 떠올랐다.

그 돈은 아까운 사고 비용이 아니었다.

아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운명이 미리 청구한 '선불금'이었던 건 아닐까.

돈을 잃음으로써 더 큰 생명을 구하는 치밀한 설계.

아빠의 미소와 아이들의 성장을 생각하면,

그 80만 원은 수천 배의 가치로 돌아온 셈이었다.



부모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과정은 전생과 현생의 업보를 씻어내는 일이라 했던가.

만약 어젯밤 편함을 택해 아빠를 병원으로 보냈다면,

평생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을 것이다.

지난밤의 고통은 고생이 아니라 축복이었다.

아빠를 지켜냄으로써, 내 마음속 깊이 남아있던 부모님에 대한 마음의 빚을

단숨에 청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7년간 남을 위해 탈탈 털어 쓴 삶이라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그 시간들이 나를 가장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가르침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왔다.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선택 앞에 서 있다.

만약 지금 마음을 먹어야 하는 힘든 일 앞에 서 있다면,

그냥 눈 한번 질끈 감고 해보길 권한다.



마음을 먹는 순간, 인간에게는 없던 힘도 생겨나기 마련이니까.

80만 원의 액땜은 돈이 아니었고, 하룻밤의 기적은 우연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되어 사랑으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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