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겨울 산, 어두운 숲길을 지나며 배운 것.
폭우가 쏟아지는 운동장에서 멘토 행사를 한다고요?
네, 무조건 합니다. 운동장으로 나오세요.
새벽에 한 어머님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오늘 같은 날도 정말 진행하시나요?"
당연한 질문이었다.
비가 오면 취소하는 게 상식이고, 불편하면 미루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나는 그날,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이래서 못 해." "저래서 안 돼."라는 말에 갇혀 산다.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비가 와서 안 되고, 상황이 좋지 않아서 안 되고,
컨디션이 나빠서 안 되고, 마음이 복잡해서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그 '안 된다'는 생각의 껍질을 한 번쯤 몸으로 깨 보게 하고 싶었다.
그날 오프닝으로 함께 본 것은 이른바 '투명 고릴라 실험'이었다.
사람은 같은 장면을 보고도 자기가 집중한 것만 본다.
눈앞에 분명히 지나가도 보지 못하고,
들려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듣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그래서 귀를 열고, 가슴을 열고, 내가 믿어온 한계를 조금은 의심해 보라고.
성장은 결국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빗속으로 나갔다.
빗물에 젖은 운동장.
옷이 젖고, 운동화에 물이 들어찼다.
아이들은 처음에 어색했다.
하지만 한 명이 뒹굴기 시작하자 둘이 따라 했고, 결국 모두가 빗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 기억을 아이들이 오래 간직했으면 했다.
힘들고 지치는 날, "그래도 그날 해냈잖아."하고 꺼내 볼 수 있는
작은 행복 카드 같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함께 깼던 것은 단지 '비 오는 날 행사'라는 형식만은 아니었다.
눈 오는 겨울 산을 올랐던 날도 그랬다.
숲 속에서 만찬회를 했던 날도, 어두운 겨울 산길을 걸었던 날도 그랬다.
처음 산에 오를 때는 앞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춥고, 어둡고,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숲 안으로 들어가면 달빛이 길을 비춰 주었다.
완벽하게 환하지는 않아도 한 걸음은 내디딜 수 있을 만큼은 보였다.
그날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무리 힘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그냥 가야 할 때가 있다고.
처음에는 캄캄한 숲길 같아도 걷고 또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목적지에 도착해 있고,
뒤돌아보면 어둠은 이미 지나가 있다는 것을.
실제로도 그랬다. 어두운 길에서 시작했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해가 떠 있었고, 세상은 밝은 아침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이 필요 없었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으니까.
인생도 그렇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은 컴컴한 동굴 속 같고,
내 앞에 길이 없는 것 같고,
나는 안 될 것 같고,
여기서 끝날 것 같아도 조금씩 걷다 보면
사람은 결국 터널을 빠져나오게 된다고.
공부도 마찬가지다.
"난 안 될 거야."
"나는 원래 부족해."
"해도 안 바뀔 거야."
아이들을 가장 먼저 무너뜨리는 것은 문제의 난이도가 아니라 자기 안의 부정적인 확신일 때가 많다.
그래서 말로만 용기를 주는 대신 몸으로 먼저 깨우는 방법을 택했다.
말은 잊힌다.
하지만 몸이 기억하는 것은 오래 남는다.
비를 맞으며 운동장을 뛰어보고,
눈 덮인 산을 오르며 숨을 고르고,
어두운 숲길을 걸으며 두려움을 지나가 보는 일.
그런 경험은 아이들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세상은 늘 편안하지 않을 것이고, 인생은 자주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몸이 먼저 기억하게 된다.
나는 아이들에게 좋은 성적만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
힘든 날 꺼내 볼 수 있는 기억,
안 될 것 같던 순간을 넘어선 감각,
두려움 속에서도 걸어본 사람만이 아는 작은 확신을 남겨주고 싶었다.
그 기억 하나가 살면서 아이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얘들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폭우 속 운동장도, 눈 덮인 겨울 산도, 컴컴한 숲길도 결국 우리를 겁주기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한계를 깨우기 위해 지나온 길이었다는 것을.
삶이 다시 캄캄해지는 날이 오더라도
그날의 너를 기억해.
앞이 보이지 않아도 걸었고,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해냈고,
두려웠지만 끝내 아침을 만났던 그날의 너를.
그 길 끝에, 해가 떴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