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자리
10년 전, 증권회사 지점장으로 근무하다 고객과의 분쟁으로
하루아침에 회사를 나와야 했던 남편.
그는 오랜 시간 깊은 상실감 속에서 자신을 책망하며 보냈다.
마음속으로 수천 번 이혼을 생각했지만, 아이들에게 아빠의 자리를 지켜주고 싶어 가정을 지켰다.
수술한 몸을 이끌고 공부방을 열었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그날의 끔찍한 사고에 대해,
한 달이 지나서야 남편에게 겨우 입을 뗐을 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쟁터에서 쓰러진 전우를 부축하는 병사가 그것을 ‘선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듯이,
나 또한 그저 살아온 본능대로 누군가를 도왔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 말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에게 “당신은 영웅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 말은 사실이지만, 그 말을 듣는 병사는 자신이 영웅이 되기 위해 겪어야 했던
끔찍한 포화와 죽음의 순간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뚫고 살아낸 사람은, 고통 속에 생을 마감한 사람의 마음을 더 깊이 공감하는 것일까.
지점장이라는 화려한 갑옷이 하루아침에 찢겨나가고,
그 아래 맨살로 절망의 칼바람을 맞으며 ‘죽음’이라는 심연의 냄새를 맡아본 사람이었기에,
그는 알았던 것이다.
자신의 가장 어두웠던 시절을 아이들과 내가 지켜주었듯,
그날 밤 또 다른 절망 앞에 선 한 영혼을 내가 지켜주었음을,
그는 ‘좋은 일’이라는 한마디로 위로를 건넸다.
그 말에 마음이 아팠다.
그 위로 속에 담긴 삶과 죽음의 무게, 공감의 깊이, 그리고 그로 인한 고독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 외의 세상 사람들은 결코 이 아픔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서늘한 진실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눈에는 내 삶이 안타깝고, 끝없는 시련에 허덕이는 조롱거리로 비칠지 모른다.
그들은 무너져 내린 공부방의 잿더미를 보고,
썰물처럼 빠져나간 사람들의 빈자리를 보며,
모든 빛을 잃어버린 내 지친 얼굴을 본다.
그들은 시련의 껍데기만을 보고, 쉽게 판단하고 비웃었다.
어느 날, 바다가 보고 싶다는 아빠의 말 한마디.
아빠의 마지막 소원일지도 모를 그 말에, 우리 가족은 함께 길을 떠났다.
이제 곧 낡은 시간을 떠나실 나의 과거인 아빠.
이 모든 시간을 감당하고 서 있는 나.
그리고 희망을 이어갈 딸아이.
우리는 손을 잡고 모든 것을 시작하고 모든 것을 품어 안는 생명의 근원, 바다로 갔다.
거친 파도와 자갈밭 같은 모래 위를,
서로를 의지하며 걸었다.
우리의 부축 속에서, 아빠는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훨훨 벗어던진 듯 평온한 미소를 띠었다.
나는 아빠의 남은 생이 평안하기를 기도했다.
아픔 속에서 성장이 더뎠던 딸아이를 위해, 그 아이를 짓누르던 닫힌 성장통을 파도에 실어 보냈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의 굴레였던 나의 운명 또한, 저 넓은 바다로 기꺼이 놓아주었다.
그날,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속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왜 그토록 딸아이에게 ‘아빠의 자리’를 지켜주고 싶어 했는지를.
이제 곧 떠나실 내 삶의 기둥이었던 아빠의 그 자리를,
상처 입은 내 남편이, 어느새 딸아이의 가장 든든한 마음의 쉼터가 되어 채워주고 있었다.
내 삶의 기둥... 그 기둥이었던 아빠마저도,
“공부방 열심히 하고, 아이들 잘 키우면서 살아라”라는 유언 같은 말을 남기셨다.
“이혼하지 말고, 자식 보고 살아라.”
과거 내 삶의 방향을 정해주셨던 그 말이, 평생 나를 지탱한 기둥이었는지,
아니면 벗어날 수 없었던 감옥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치매 환자가 아니었다면 이번에는 반항이라도 해보지 않았을까.
그저 아빠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보지 못했다.
그 시련의 이유를.
그 고통의 목적을.
내가 왜 그 모든 것을 온몸으로 통과해야만 했는지를.
그 폐허 속에서, 내가 무엇을 지켜내고 있었는지를.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재를 딛고 내가 어떤 존재로 다시 피어나는지를.
그들은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