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의 지혜

by 고백

이번에도 나무가 먼저 나를 불렀다.


영겁의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커다란 나무가 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두꺼운 나무의 기둥은 안쪽에 또 다른 세상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세상의 마지막까지 뿌리내린 굵은 뿌리들은 각색의 세상 이야기가 담겨있어 소곤소곤 떠들기 바쁘다. 나무는 작은 영혼들의 소란스러운 희로애락을 위해 곁을 내어준다. 나도 종종 나무에게 놀러 가 기대었다가 온다.


새순이 돋고 꽃이 피면 나무가 나를 부른다. “곧 있으면 큰비가 와. 그전에 꽃의 모습들을 담아둬.” 말라있던 나뭇가지에 연두색의 여린 잎과 하얀 꽃이 핀 것을 보니 나무가 사뭇 달라 보인다. 나는 꽃을 오래 보고 싶은 욕심에 꽃 시들지 않을 순 없냐고 나무에게 물었다. “봄은 가야만 해. 그래야 여름이 올 수 있어. 여름에도 많은 추억들을 가지고 있잖아.” 나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가 쏟아진다. 나무가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을 한다. 나는 나무 기둥에 가까이 서서 비를 따라 흘러가는 꽃잎을 바라본다. 나는 저 꽃잎들이 어디로 가는지 나무에게 물었다. “내 뿌리 끝에 있는 누군가의 봄이 될 거야. 이제 비가 그쳤어. 나를 다시 봐.” 나무의 말을 따라 올려다보니 나무의 새순들이 크고 짙은 녹색으로 변한 것이 보였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는 작고 빨간 구슬들이 매달려있다. 올곧은 생명력이 느껴져 나까지 설레었다.


”내가 올여름에 돌봐야 할 아이들이야. 가을이 되면 저마다의 모습으로 변할 거야.” 나는 작고 귀여운 구슬들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나무에게 물었다. “하늘이 주신 작열로. 저 작열은 나의 꿈들을 키워주고 있어. 너에게도 필요한 거야. 어서 내 그늘 밖으로 나가서 꿈을 키워봐.” 나무가 내 등을 떠민다. 눈이 부셔 앞은 잘 보이지는 않지만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내 주의를 감도는 열기는 내 호흡을 타고 폐로 들어온다. 폐에서 흡수된 열기는 빠르게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간다. 심장 박동은 빨라지고 뺨을 붉어진다. 근육들은 힘을 얻고 땀이 나기 시작한다. 땀을 흘리는 나를 보고 나무는 바람을 불러와줬다. 바람이 내 피부를 스치는 느낌이 간지럽다. 바람 따라 흔들리는 나뭇잎의 소리에는 생명의 자신감이 들어있다. 나무는 그중 하나를 낚아채 내 손에 쥐여줬다. “이건 아주 중요해. 잃어버려서도 잊어버려서도 안 돼.” 나는 혹여나 손 틈새로 빠질까 기도하듯 꼭 쥐었다.


갑자기 달큼한 향이 난다. 작은 구슬들이 주먹만 한 크기의 빨갛고 동글한 열매로 변했다. “가까운 열매를 먹어. 위에 있는 것들은 남겨줘. 지나가는 새들을 위한 거니까.” 손을 뻗어 열매를 따냈다. 똑 따낸 열매를 보니 내 손에 작은 태양이 있는 듯했다. 한 입 베어 무니 나온 하얀 과육은 하늘이 주셨던 작열과도 닮아 있었다. “씨앗은 내 뿌리에 뿌려줘. 꽃잎처럼 내 뿌리를 타고 가서 누군가의 가을이 될 거야.” 나는 씨앗을 뿌리에 뿌렸다. 씨앗은 뿌리를 타고 흘러갔고 그와 동시에 나무의 잎도 가을색으로 변했다. 나무는 빠르게 식어갔고 점점 열기를 잃은 잎들이 뚝뚝 대지로 떨어졌다. “이제 겨울이 오고 있어. 바람은 매섭겠지만 하얗게 변한 세상은 무척 아름다울 거야.”


이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소복이 쌓이더니 나무는 다시 봄꽃을 피운 것 마냥 하얗게 변했다. 세상은 금세 하얘지고 적막해졌다. “자, 눈이 세상의 소리를 가져갔어. 이제 너의 소리를 들을 때야.” 나무는 내 눈을 가렸고 나는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였다. 내 숨소리가 들린다. 내 숨소리에 집중해 본다. 내 숨을 따라 무언가가 분주히 움직인다. 감정이다. 내 불안과 근심이 호흡을 따라 들락거린다. 곧바로 낙관과 재미가 뒤따라 움직인다. 또 그 뒤로는 우울과 허무가 움직인다. 끊임없이 감정들이 드나든다.


“이제 너도 너의 자리로 돌아가야 해. 내가 알려준 사계의 지혜를 기억해.” 나무가 말했다. 나는 눈을 뜨고 나무를 봤다. “너의 언어를 온전히 이해하기엔 아직 내가 어리석어.” 내가 대답했다. “뿌리에 손을 얹어봐.” 나무가 말했다. 나는 쭈그려 앉아 뿌리에 쌓인 눈을 걷어내고 손바닥을 대었다. 내 손바닥을 밀어내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것은 두근두근 울리는 나무의 박동이었다. “내 박동은 멈추지 않아. 이 소리가 듣고 싶다면 언제든지 다시 와.” 나무가 나를 달랬다.


나는 내 모습이 바뀌고, 내 기억이 지워져도 나무가 먼저 나를 부를 거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떠날 수 있다. 나는 일어나서 나무가 준 것을 손에 쥔 채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