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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바미 Apr 25. 2019

독일 유학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세 가지 이유.

딱히 교훈 없는 실패담

 미대를 졸업하고 일단은 돈을 버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순수미술이라는 전공을 살려 일한 만한 곳은 드물었다. 학교 다닐 때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고 먹고사는 현실적인 방법을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기에 일단 어디라도 일할 수 있는 곳에 가서 돈을 벌었다.

 이것저것 일을 했지만 그중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이 미술학원 강사였다. 당시에는 사대보험도 들어주지 않고 최저임금보다 못한 임금을 받기 일수였다. 빨리 그만두고 하고 싶었던 미술을 하기를 꿈꿨지만 불가능해 보였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만큼 절실하지 않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꿈이 절실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회초년생이 었던 나는 모든 직장생활에 쉽게 지쳤고 작은 일에도 자존감은 뚝 떨어졌다. 그러던 중 내 삶을 위해 나의 가치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유학을 결심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모님의 경제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나 독일에서 유명한 작가가 돼서 돌아올게.” 부모님께 나의 큰  포부를 밝혔다.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어디서 나왔는지. 한마디로 뻥카였다.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내 계획은 “일단 가자. 가서 독일에서 뼈를 묻자”였다. 그렇게 시작된 무모한 유학 생활의 결과는 제목에서 이미 알 수 있다.


독일 유학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세 가지 이유.


첫째, 쉽게 도움을 요청했다.


  독일 유학을 무작정 떠날 수 있었던 계기중 하나가 이미 다녀온 사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교 선배이자 시간강사를 하던 분이었는데 독일 유학을 최단기로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시간강사를 따냈다. 그 당시 내가 느끼기엔 미대 졸업 후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모범답안이었다.

  유학 준비하는 동안은 이분이 롤 모델이었다. 무지했기에 그냥 무조건 그분이 밟았던 절차를 그대로 따라갔다. 조언 따라 파더보른대학교 입학 신청서를 냈다. 일단 합격하면 주어진 어학 코스를 마친 후 학사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파더보른대학교에는 내가 원하는 실기를 할 수 있는 학과가 없었지만 일단 그나마 미술에 관련된 미학과를 선택했다. 입학 후 어학 코스를 밟으면서 다른 미대에 지원할 마페(포트폴리오)를 만들면 된다는 그분의 조언 때문이었다.  

 이미 한국에서 학사를 끝낸 상태라서 그런지 쉽게 합격통지서 받았고 (비자를 받기 위해 보증인이 필요해서 친척의 도움을 받은 거 빼면) 큰 어려움 없이 학생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다음 문제는 집이었다. 혈혈단신 독일 땅에서 어떻게 집을 구할지 막막했다. 일단 유학생 사이트에 글을 올려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일을 받았다. 파더보른 교회의 한인 목사님이고 집을 구해 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할렐루야!

 

 이제와 생각해보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이 된 것은 행운이 아니라 독이었다. 유학 준비는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흘러갔고 나는 그저 그 물살에 통통배 하나 뛰워놓고 휩쓸려갔던 것이다.

 너무 쉽게 도움을 요청했고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의 노력으로 얻었다고 하기엔 너무나 쉽게 주어졌던 것들이 나를 방심하게 만들었다. 막상 독일 생활에서 중요한 결정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것이었다.


둘째,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비행기 티켓을 끊을 때 편도로 끊었다. 마냥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여행을 떠나는 듯 설레고 있던 나에게 티켓을 끊어주던 여행사 직원은 걱정스러운 듯 왕복을 끊지 그러냐고 말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오고 싶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콧방귀 뀌었다. 난 독일에 뼈를 묻겠다 다짐했기 때문이다.


 여행 목적으로 2주 정도 독일에 간 적이 있었지만 유학을 위해 독일에 도착했을 때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겨울이라 해가 엄청나게 짧았고 어둡고 축축한 날의 연속이었다.      

 좁은 다락방에서 짐을  풀고 나니 멍해졌다. 막상 아무도 없는 이 낯선 땅에서 뭔가 해 낼 수 있을지 그제야 의문이 들었다.


 목사님이 구해준 집은 4층짜리 건물에 1층이 미용실이고 나머지는 세를 내어 주는 방들이 있었다. 내가 묵는 곳은 꼭대기 다락방이었다. 나이 지긋한 독일인 부부가 주인이었는데 외국인들에게 꾀나 친절했다. 내가 지내는 곳은 3~4평 남짓한 작은 다락방이었는데 한국 유학생들이 많이 거쳐간 곳이었고 다른 방에 한국 유학생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추후 모두 유학생활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학교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숫기가 없어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 소통해야 할지 막막했다. 첫 수업시간에 덩치 큰 러시아 남학생이 앉았는데 직설적인 화법이 나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쉬는 시간 이 끝나고 돌아온 그 아이에게 나던 담배냄새가 아련하게 기억난다.

 그중 일본 교환학생도 있었는데 우리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함께 해야 한다고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같은 동양인이라 정서가 비슷해서 인지 낯선 곳에서 동질감을 느껴서 인지 어설픈 독일어로 유일하게 마음을 나눴던 친구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친구도 곧 일본으로 떠났다.


 난 무교이지만  교회를 나갔었다. 이유는 집을 구해준 목사님께 감사해서였다. 그런 이유로 언제까지 나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갔다. 교회에서 사람들도 만나고 좋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신앙심이 없으면서 계속 나간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어서 6개월 정도 다니다 그만 나가게 되었다.

  

 파더보른. 그 작고 조용한 도시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 임을 느꼈다. 그리고 스스로 고립되었다.

 떠나기 전 나는 고독을 즐기고 사유할 줄 아는 인간이라고  착각했었다. 20대의 나는 예술하는 사람이랍시고 다크포스 풀풀 풍기고 다니는 인간이었다. 혼자서 예술 영화를 보러 다니고 전시를 보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그런데 그땐 가족이 있었고 친구가 있었다. 내가 원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혼자 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성공 사례를 따라 한다고 내가 그 사람이 될 순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일지라도 나에게 꼭 맞는 방법인지는 모르는 것이다.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했지만 그때의 난 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셋째, 실패가 두려워 포기했다.


  모두가 떠난 그 도시에서 더 이상 혼자 지낼 수 없어 도망치듯 베를린으로 이사를 갔다. 독일에서 개인 사업을 하는 한국인 집이었다. 그때가 유학 1년 차였다. 나는 많이 지쳐 있었지만 베를린은 나에게 활기를 넣어준 도시였다.

  유학생 사이트를 통해 한국에 관심 있는 독일인과 교류를 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주기적으로 독일인 친구를 만나 언어 교류를  했다. 가끔 술자리가 있으면 어설프지만 독일어로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다.


 대도시에 있다 보니 생활비가 부족해서 끼니를 거르게 되었다. 그 당시 베를린은 수도 치고 물가가 많이 비싼 건 아니었지만 친구를 사귀고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돈이 들었다.

 그리고 파더보른 대학교에 소속되어 있을 때는 제메스터 티켓(이 티켓이 있으면 그 도시가 소속되어있는 주의 대중교통이 무료이다)이 있어 생활비를 아낄 수 있었지만  베를린에서는 사설 어학원에 등록할 수밖에 없어 교통비를 지불해야 했다.


 몸이 허해져 였을까 아니면 원래의 성향 때문일까 부정적인 마음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들을 정당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때가 1년 반의 시간을 흘렀고 두 번의 불합격 통지를 받고 난 후였을 거다.

 미술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미술관에서 봤던 난해한 현대 미술들. 이론만 거창해 보이는 사물들의 나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것들은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그것이 비해 환경보호나 복지 봉사 같은 일들은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겨우 두 번의 불합격 통지를 받고 실패가 두려워 나는 머릿속에서 말도 안 되는 논리의 향연을 펼쳤다. 독일 생활은 너무나 외롭고 허했고 결정적으로 비자 기간이 겨우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몇 개월 남은 시간 동안 더 이상 미대를 지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가야 한다고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 번에 합격 통지서를 받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수십 번 지원하고 교수들에게 수십 통의 메일을 쓰고 그렇게 합격한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난 그렇게 하고도 불합격하는 사람이 될까 두려웠다.



실패 후 얻은 교훈은 없었다.


 실패는 실패일 뿐이다. 거기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면 안 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로 포장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한 번의 실패로 내 인생을 걸어서도 안된다. 그저 인생의 수많은 실패 중 하나일 뿐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난 그러질 못했다. 미련과 후회가 내 눈을 가렸고 귀를 막았다. 진정 내가 원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내 속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나를 방치했다.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내가 그때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정리하는 글을 쓴다. 그때와 난 다를 게 없다. 아직도 나는 그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아직도 나는 자주 도움을 요청하고 나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실패가 두렵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 뻥카를 날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내가 좋다. 언젠가 내가 잘 되길 바라고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 또한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던 그 시절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포장할 생각 없다. 그저 내가 살았던 어떤 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공감이나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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