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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바미 May 02. 2019

외로움의 해결방법은 인간관계가 아니다.

필연적 외로움에 대하여

 



 인간이 가장 완벽하게 충만하다고 느낄 때는 언제일까. 그건 아마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가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태어나 탯줄을 끊는 그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외로움과 함께 한다.

 





 어릴 적 나는 친구 관계에 서툴렀다. 타인과의 관계를 맺기보다는 내 안에 우물을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 우물을 함께 들여다볼 친구가 필요했다.


 학교를 다니며 자연스럽게 친해진 친구들이 생겼다. 하지만 몇몇의 무신경한 친구가 툭툭 내뱉는 말에 쉽게 상처 받고 힘들어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너무 예민하고 유별 나다고 했다.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감정에 무딘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라면 상처 받았을 말들을 쿨하게 넘기는 모습이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에 비해 나는 속 좁은 아이처럼 느껴졌다.

 시도 때도 없이 새어 나오는 눈물도 콤플렉스였다. 내가 원하지 않을 때도 걸핏하면 흘러나와 눈물은 나에게 수치스러운 존재였다.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된 이후로 속이 좁고 눈물 많은 그 아이를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혹시 사람들에게 틈을 보일까 날 선 방어기제를 작동시켰다. 나름 열심히 틈을 메웠다고 생각했지만 종종 속 좁은 그 아이가 어느 틈을 비집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서 그런지 스물한두 살 때는 술 마시면 우는 진상 진상 주사가 있었다. 한 번은 과 동아리 전시 뒤풀이에서 나이 지긋한 여자 교수님 품에서 울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후 몇 번을 자기 전에 이불 킥을 날렸던 것 같다.

 그렇게 어설프게나마 나를 꼭꼭 눌러 담아 숨겨왔던 시간들이 쌓이고 쌓였던 걸까.


 “너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라서 눈물이 없을 것 같아”


 얼마 전 5년을 넘게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 들었던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드는 감정은 언어로 표현하기엔 너무나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다.

 그렇게 숨기고 싶었던 못난 내 모습을 이 사람은 보지 못했다는 것에 쾌재를 불러야 하거늘. 기쁘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나를 억눌러 왔던 것인가. 쿨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던가.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했던 수많은 말과 행동들이 떠올랐다. 그 또한 나일 수도 있지만 그 날은 왠지 씁쓸하고 쓸쓸했다.

 

 외롭지 않기 위해 나의 못난 모습을 숨기고 타인을 대하고 관계를 맺었지만 오히려 나는 더 외로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날의 대답은 아마 “다행이네요”였다. 뭐가 다행이란 건지. 그 또한 방어기제였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깊숙이 눌러 담았던 사람들은 솔직해지기가 쉽지 않다. 자신도 모르게 더욱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깊숙한 곳으로 찾아와 나에게 말 걸어주길 바란다.


   




 지인의 말을 들은 이후 이런저런 생각의 끝에 “나는 왜 아직도 이토록 인간관계에 예민할까”라는 물음에 다다랐다. 상대방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끝도 없는 잡념에 빠진 내 모습은 아직 사춘기를 못 벗어난 듯 보였다.


 가끔 스스로가 유치하고 아이처럼 느껴진다면 애인이 있고 친구가 있고 배우자가 있어도 완벽히 이해받지 못해 울적하다면 그건 상대방 때문이 아니라 필연적 외로움 때문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충만했던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태아로 돌아가지 못하듯 필연적 외로움 또한 채울 수 없다. 나의 외로움을 누군가 채워 주길 바라는 것은 상대방을 고달프게 만든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많은 걸 바라게  되는데 스스로 깊고 깊은 우물 속에 들어가 왜 나를 내버려두냐고 화를 낸다.


 나에게 그 대상은 남편이었을 거다. 유별나게 예민한 나의 고삐를 풀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

(그렇다고 해서 있는 대로 예민함을 발산하면 그날은 부부싸움이니 조심해야 한다. )


 연애와 결혼 출산과 육아랑은 별개로 외로움은 존재한다.


 결혼 후에는 외롭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 꺼려졌다. 부부 사이가 문제가 있다고 오해를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그런 생각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가끔은 결혼을 찬양하는 이야기를 해댔던 것 같다.

 하지만 행복과 외로움은 반의어가 아니듯 외로움과 불행은 동의어가 아니기에 조금은 솔직해져도 될 것 같다.

 

 부부라고 해서 서로의 모든 것을 공감하고 이해할 순 없다.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지켜봐 주는 것이다.

 나와 남편은 같은 열차를 타고 같은 길은 걷고 같은 방향으로 향하지만 각자의 배낭 안에는 자신의 몫인 외로움이 들어있다.

 가끔은 배낭을 내려놓고 쉬어 갈 수 있겠지만 귀찮다고 배낭을 버리거나 무겁다고 서로에게 짐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의 몫은 스스로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다지 길지도 않은 이 글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를 반복했다.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문장을 매끄럽게 만드는 게 어렵고 많이 부족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아직도 나는 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결론을 내지 못했다.

 기질이 예민한 나에게 아마 평생의 숙제 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그저 스스로에게 외로움은 숨기고 내리눌러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 삶 속에서 함께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누군가가 대신 채워 넣을 수도 없고 억지로 채울 필요도 없다고. 지금은 일단 그냥 내버려 두고라고.


 아이러니 하지만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공감하길 바라며 어설프지만 열심히 문장을 다듬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남편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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