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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바미 May 17. 2019

다 읽지 못한 책.

아주 사적인 연애 이야기.

 


 스물아홉.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우리는 기타 동호회에서 서로 알게 되었지만 처음 남편을 만난 건 지하철에서였다. 서로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있었고 왜인지 첫인상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뭐랄까 내가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은 아닌 느낌적 느낌. 지하철을 내려 기타 연습실에 도착했는데 지하철에서 마주 앉아있던 그가 있었다. 동호회에 다닌 지 몇 주가 지났을 무렵이었는데 남편을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조용하게 연습실 구석에서 어설프지만 열심히 기타를 연습했다. 남편은 기타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밴드 음악을 좋아해서 기타를 배우는 것이 로망 중 하나인 데다가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은 후라 뭔가 집중할게 필요했던 것 같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고 기본 코드로 이루어진 몇몇 곡들의 반주를 치기 시작했다.

 


 남편과는 접점이 없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난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고 나랑 맞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가려냈다. 아마 남편도 가려낸 사람들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은 동호회 친목을 다지는 술자리에서 남편을 만났는데 목소리가 너무 커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저쪽 끝으로 가달라고 했다.



 스물아홉, 그해 크리스마스 즈음이었다. 신청자에 한해 크리스마스 공연을 하는데 제비뽑기로 팀을 정했고 남편을 포함한 4명이 한 팀이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한 건.

 나랑 정반대인 그가 궁금해졌다. 모든 것이 농담이고 모든 일에 유쾌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세상에 저런 사람도 있나 싶을 정도였다.



 나랑 비슷한 사람을 찾으면서도 왜 정반대의 사람에게 끌리는 것일까?

 심각하지도 무겁지도 않은 그의 가벼운 말투가 좋았다. 잡생각이 많은 나에게 그의 장난스러운 말투와 행동은 잠시나마 스스로를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에게 인간적으로 호감을 가졌던 차에 그가 나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고 서른 살, 나는 연애를 시작했다.







 그의 가볍고 유쾌한 말과 행동 뒤에 아픔이 있었다. 아마 유쾌한 말과 행동은 언젠가는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방어기제는 지금의 그를 만들었고 하나의 페르소나가 되었다. 내가 첫인상으로 섣불리 판단했던 그는 그의 미미한 일부분일 뿐이었다.

 


 나랑 정 반대라고 생각했던 그는 미묘하게 나랑 닮아있었다. 우리는 서로 달라서 싸우기도 했고 비슷해서 싸우기도 했다. 싸우는 횟수는 적었지만 한번 싸우기 시작하면 진심을 다해 싸웠다.


 

 우리의 싸움 포인트는 조금 엉뚱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도대체 왜 쓸데없는 일로 감정을 소비하는 이해를 못 할 것이다.

 한 서점의 판매 1위였던 책 때문에 싸웠던 적이 있다. 그 책은 한때 SNS에서 핫 했던 작가의 시집이었는데 나는 그 책이 판매 1위라는 것이 씁쓸하다고 했고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왜 내가 씁쓸해하는지 피력했지만 끝내 공감을 얻어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출판되는 많은 책들이 소비되지 못하고 결국은 파쇄되는 일들이 허다하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지 못한 작품의 작가들이 느낄 허망함 그 슬픔을 스스로에게 대입시켰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독자들에게 외면받는 문학 작품을 인정받지 못해도 언젠가는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은 나의 소망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아마 나는 이해보다는 공감해주길 바랬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공감은 요구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지만 난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도망가지 않았던 남편 덕분에 우리는 연애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나를 태풍의 눈으로 이끌었다.





 

  20대에 나를 알던 사람들이 지금의 나를 보면 많이 변했다고 느낄 것 같다. 남편을 만난 후로 나는 남편을 모방한 또 다른 페르소나가 생겼다.

 친척모임에서 어릴 적부터 나를 봐왔던 친척들이 내가 남편을 만난 후 많이 밝아졌다고 하니 내가 변하긴 변한 것 같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변할 수 없지만 표면적으로 라도 누군가를 변하게 한다면 누군가에 의해 변화한다면 그것은 진심에 의해서다. 순간순간 작은 진심들이 모여 한 사람을 변화시킨다.



 처음 남편을 보았던 장면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지하철 맞은편의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은 사람.

 아직도 우리 부부에게 종종 회자되는 우리의 처음이다.

 

 

 나이가 들면 들 수록 자신이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나는 조금 어린 나이부터 스스로에게 사람을 꾀 뚫어보는 신비한 초능력이 있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섣불리 나를 판단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내가 타인을 판단하는 것에는 관대했던 나였다.


 첫인상에 섣불리 남편을 판단했던 그때의 나는 우리가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 한없이 겸손해진다.







 어느 연애상담 프로그램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봐야 여러 유형의 사람을 경험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연애의 횟수만큼 사람을 잘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다. 다중인격이 아니더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 외적 인격은 변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사람을 안다고 해서 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한 사람의 일부분만 보고 판단하고 이야기 하는 것은 다 읽지 못하고 덮어둔 책을 다 읽은 척 생색내며 말하는 것과 같다.



 남편은 아직도 다 읽지 못한 어렵고 두꺼운 책이다. 읽어도 이해를 못해 다시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펼쳐 들기를 미루기도 한다.

 어쩌면 나의 연애는 서로에게 두껍고 어려운 책을 서로에게 쥐어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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