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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애 Nov 01. 2020

그림에 죗값을 묻었다
힙스터는 아무나 하나

[작가의작가]11.이상 : 예술이 삶을 지배할 때 벌어진 비극

“어느 한 사람이 자신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어떤 유용한 물건을 만들었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다. 쓸모없는 것을 만들었을 때 그에 대한 유일한 변명은 그것을 지독하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정말 쓸모 없는 것이다.”


 서문을 읽자마자 뇌가 울렸다. ‘그래, 예술은 쓸모가 애초에 없다고 선언하니 사용가치로부터 해방될 수 있구나.’ ‘그래, 오스카 와일드는 가치 평가를 위한 대상에서 예술을 지워버리는 해방을 시도했구나’라는 깨달음의 종이 댕댕댕울렸다. 


 예술을 다른 가치들 보다 우위에 두는 유미주의 운동에 앞장섰던 오스카 와일드는 당시 부르주아의 위선적인 도덕주의를 향해 ‘렛잇비(Let it be)’를 외쳤던 힙스터였다. 아름다움이 곧 지상 최고의 선(善)이요, 예술은 목적 없는 상상력이자, 예술은 그 자체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예술 지상주의를 신봉했다. 한 마디로 유미주의는 예술이면 뭐든 용서가 된다는의미다. 예술을 시대적 책임로부터 해방시키고 작가의 주관성과 예술의 자율성을 무엇보다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 되니 그림에 선과 악을 가르는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런 유미주의의 등장은 19세기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한 것인데, 당시에는 평단과 대립각을 세운 소수의견에 불과했다. 발표하자마자 ‘폼 잠고 싶은 얼간이가 쓴 도덕적으로 타락한 위험한 작품’(역자 해설) 소위 나르시시즘에빠진 중2병이나 읽을 작품이라는 혹평을 받다보니, 이듬해 <사회주의하의 인간의 영혼, 1891>을 발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자본주의하의 현실에서는 예술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항변이었다. 고대 그리스 미술의 이상을 추구하려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니 빈곤과 생존에 대한 악전고투가 없을 이상적 세계를 사회주의를 통해 꿈꾼 것인지도 모른다. 


 “그대가 예술을 향유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예술적 교양을 갖춘 인간이어야만 한다.”<작가의 작가-10.자본 참고> 는 마르스크의 미학 원칙이 떠오르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유미주의를 통한 오스카 와일드의 이상이 종국엔 퇴폐나 향락으로 빠질 수 밖에 없다하더라고, 예술 작품마저 영혼을 갉아먹는 ‘돈지랄’ 상품으로 전락시킨 자본주의에 이유있는 반항을 했다. 이후 비난 일색이었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초판본에 예술론을 담담히 고백한 서문을 더하고 논란이 된 부분을 수정해 20장으로 구성한 개정본이 지금까지 널리 읽힌다.  


 역설적이게도 삶과 예술을 혼동한 주인공의 말로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보여준다. 예술이 예술 자체가 되는 이상은 실제 삶과 다르므로 적당한 거리를 둬야하기 때문이다. 도리언이 영원한 아름다움과 젊음을 갖는 대신 초상화가 늙어간다는 대강의 줄거리만 봐도 파국적 결말을 예측할 수 있다. 역자해설에 따르면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이 되고 싶었던 존재이고, 헨리 워튼 경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고, 바질 홀워드는 실제 자신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 가운데 파국을 예측하고 막으려고 했던 인물은 바질이었다. 그는 순수한 도리언을 숭배했다. 하지만 유미주의자 헨리와의 만남을 통해 도리언이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면서 타락한다. 초상화 완성 직전에 둘의 만남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이유였으리라. 예술로써 아름다움에 대한 완성을 구현하려고 노력하지만 자신의 삶은전혀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걸작인 초상화 전시를 극구 사양했던 것도, 자신의 영혼을 투영해버린 작품을 사람들이 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예술로 부터 적당한 거리 두기, 거기서 진정한 미의 완성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 오스카 와일드의 삶도 이를 방증한다. 전기적으로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렸다가 처벌받은 사실이나 주인공 도리언의 파렴치한 행동들은 도덕성을 문제 삼을 수 있다. 아름다움을 위해 이상적 자아를 추구하는 것이 결국 영혼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것. 미적 이상과 달리 결국 자신이 투영된 소설과 등장인물들을 통해 삶과 예술의 경계가 불분명한 한 세상을 살았다는 것. 도리언은 오스카와 거리두기를 바랐지만 오스카는 도리언을 숭배하는 비극이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묘하게 오가는 유미주의의 상대적 모순이 아닐런지. 현실은 바닥, 이상은 천상인 자각 때문에 또 종교의 문제로 천착해야하는지 생각만 뭉게뭉게 커진다. 


 소설을 읽는 내내 도리언 그레이에 부합하는 배우를 계속 떠올려보았다. 연식이 좀 됐나 싶지만 한국엔 원빈, 미국엔 조지 클루니, 중국은 양조위, 일본엔 기무라 타쿠야 등등 완벽한 아도니스는 누군지, 21세기 도리언 그레이을 꼽으라면 '얼굴로 열일’하는 강다니엘이면 되려나. 존재만으로 용서가 될 거 같은 당신만의 아도니스를 그려봐도 좋을 일이다. 갤러리를 누비며 빨간 스티커를 붙여대는 큰 손이 될 일은 요원하지만 예술 지상주의를 다시 불러오는 것은, 문학으로 거듭난 예술 탐닉에 빠져서 잠시나마 화려한 힙스터가 될 수 있다는 무한 상상력 덕분이다. 고백컨데 이 쓸모없는 문학을 지독하게 좋아한다. 이것이 인내심 있는 독자를 위한 유일한 변명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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