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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애 Nov 01. 2020

빼앗긴 시간에 감춰진 착취
칼퇴 천국 야근 지옥

[작가의작가]10.자본: 돈이 종교가 된 사회, 그 말로는

“누군가 10억 원을 준다면, 애인이랑 헤어질 수 있겠냐?”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질문인지, 열에 여덟은 아니라고 얘기했지만 3초라도 대답을 머뭇거리면 당장 헤어지라는 개똥철학을 늘어놓았다.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다니던 친구는 급진 사회주의자였다. 스스로 자본주의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믿었고 사랑마저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세태에 뭔가 강한 펀치를 날리고 싶어했다. 그는 온갖 이슈를 마르크스의 논리로 재단했다. 그에겐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의 값어치가 대략 10억 원쯤 돼 보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모든 것이 거래를 위한 상품이 되니까 밥, 옷, 집뿐만 아니라 행복, 우정, 사랑도 살 수 있다. 내 노동력을 팔아야 돈을 벌 수 있고 돈을 벌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상품으로 둔갑한 감정도 돈으로 거래할 수 있다며. 학회며, 학생회장에 진보정당 당원까지 겸하면서 학비는 자칭 ‘신성한 노동’인 아르바이트로 충당했다. 이 생계형 불온주의자는 토익책 대신 <자본론>을 읽었다. 누군가는 이상주의자라 조롱했고, 철없다 비웃었다. 사서 고생을 자처한 ‘21세기 마르크스’는 불편한 존재였다. 개인의 의식과 감정이 시스템을 이기는 것은 지금껏 불가능했기에.


 예언은 벌써 빗나갔다. 마르크스(1818~1883)가 예언한 공산주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빗나간 예언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은 아름답지 않은 자본주의의 실체를 성찰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상존하는 빈부격차, 비정규직, 반복되는 불황과 공황, 환경파괴 등 해결할 수 없는 삭막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왜 열심히 일해도 노동자는 어렵게 살아야 하는지, 왜 갈수록 빈부격차는 심화되는지, 왜 비정규직을 전전해야하는 ‘미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개별적 현상 확인에 그치는게 다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8년 엥겔계수는 13.8%로 17년 만에 가장 높았다. 백 만 원을 벌면 13만 8천 원을 먹는데 쓴다는 의미다. 지수가 높을수록 생활형편이 팍팍하다. 무엇보다 주목해야할 것은 빈부에 따라 지수상승 이유가 달랐다는 점이다. 상위 20%는 값비싼 고급 식재료를 사느라 식료품 비중이 높아졌고, 하위 20%는 다른 소비를 줄이느라 상대적으로 식료품 지출이 늘었다. 대학생 절반은 성공요인 1순위를 ‘부모의 재력’으로 꼽았다(출처: KDI). 다음으로 ‘인맥’이 뒤를 이었다. 노력과 능력보다는 출신과 배경이 자신들의 삶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계층간 이동에 대해서는 더욱 비관적이었다. 30대 열에 일곱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애써봐야 결국 제자리라는 것이다. 급기야 ‘수저 계급론’까지 나왔다. 가계소득이 갈라놓은 수저 색깔이 곧 신분을 결정한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돈으로 결정되니 뒷배 든든한 재벌일가의 갑질은 자본주의의 민낯을 드러낸다.


 정도만 다를 뿐 150년 전 런던의 실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정부의 박해를 피해 유럽을 전전하다 영국으로 간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이 태동한 일류국가로 유럽의 미래 사회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거대한 빈민굴, 전염병의 창궐, 불황이 닥치면 곧장 거리로 나앉아야 했던 가난  노동자, 걸음마 떼기가 무섭게 공장으로 내몰리는 아이들, 범죄가 뒤죽박죽된 현실은 그를 충격에 빠트린다. ‘어떻게 삶이 더 나아지나’에 무게를 둔 아담 스미스와 달리, 저술 방향은 ‘왜 나라가 부유해져도 국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기심이라는 인간의 본성이나 윤리에서 원인을 찾는 대신 구조를 살펴보는 것. 현실 속에서 진리를 모색하자는 것. 이것이 유물론의 핵심이다.


 자본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생산관계로부터 출발한다. 자본가가 생산 수단을, 노동자는 노동력을 갖고 있다. 고전 경제학이 완성된 상품으로부터 가격을 매기는 것과 정반대로 생산과정에서 감춰진 노동시간이 가치척도 기준이다. 즉 밀가루와 제빵기계가 있다고 맛있는 빵이 만들어질 수 없듯이, 생산과정에 숨어있는 제빵사의 노동력에 주목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시간이 온전하게 상품에 반영될 수 없는 구조에서 착취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자본의 일반공식 [M(자본)-C(상품:생산수단, 노동력)-P(생산)-C’(새상품)-M’(증식된 자본)]을 살펴보면, 하루 8시간 동안 노동으로 빵 8개를 생산하는 노동자는 일당으로 빵 1개를 지급받는다. 빵 1개의 교환가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원료인 밀가루(빵 1개에 필요한 밀가루 1kg)와 제빵기계의 감가상각, 노동력의 합으로써 각각 1노동시간이라고 가정하면, 3노동시간이다. 따라서 빵 8개의 교환가치는 24노동시간이다. 1노동시간을 1만 원이라고 가정하면, 자본가는 초기 자본금(M)으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구입하는 단계(C)에서 총 필요 자금은 생산수단 16만원(밀가루 8kg+기계 8노동시간)과 임금 3만 원의합 19만 원이다. 노동력(P)이 투입되면 총 24노동시간 가치의 빵(C’)을 생산되고 자본가에게 24만 원(M’) 의 자본을 안겨준다. 여기서 노동자는 8시간 중 3시간의 필요노동을 하고 빵 1개를 임금으로 갖고, 자본가는 5시간의 잉여노동, 5만 원의 이윤을 챙긴다.  자본가도 자본가간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거쳐 충분한 잉여가치를 생산해내지 못하면 도태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을 증명한 법칙들이다. 일한만큼 추가 수당을 받는 성과급제가 합리적으로 비춰지지만 실상은 자발적 착취 효과를 감추고 있다는 점, 기술 발전으로 인간의 노동을 기계가 점차적으로 대체 하면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불변자본에 대한 가변자본의 감소)의 고도화에 따른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에 따라 인간 노동력이 기계로 완전히 대체되는 순간, 자본주의가 스스로 파산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종말을 예언했다. 

 연대순으로 마르크스의 저서를 살펴보면 그의 사상적 성장을 관찰할 수 있다. 노동 소외라는 개념을 최초로 언급한 <경제학-철학 수고,1844>부터 실천적 혁명가로서 면모를 볼 수 있는 <공산당 선언 1848>, 사상가로서 이론적 검증을 마친 <자본론I, 1867> 등 변증법적 유물론을 그대로 관류한다. 사상으로 현상을 해석하는 철학가가 아니라, 현상에서 사상을 찾는 현실주의자로서, 이론이 실천을 통해 검증되는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 진리에 이르고자 했던 혁명적 사상가의 과학적 분석이 담겨있다. 그러나 이런 뛰어난 현실감각에 대비되는 대안제시가 마르크스의 약점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의 정치권력 장악은 너무 과격하기도 할 뿐더러 변증법을 지나치게 극적으로 해석했다는 한계도 있다. 

 <공산당 선언>은 ‘그들에게는 얻어야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고 끝맺는다. 20대 친구가 얻고 싶었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념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작금의 문제를 해결할 할 수 있을 거라 믿는 순진한 사람도 거의 없다. 친구는 차가운 거리 대신 따뜻한 시청으로 출근한다. 문학의 ‘쓸모’를 고민했고 여전히 고민 중인 나는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 대신 그냥 잉여로 살고있다. 오해는 말자. 21세기 마르크스는 ‘멘탈 금수저’로 생활의 무게를 견디며 잘 지내고 있다고 믿는다. 내가 꾸역꾸역 별일없이 잘 살고 있듯이.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등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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