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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애 Nov 01. 2020

하찮아도 괜찮아
그게 인간이니까

[작가의작가]13.승리 : 위태롭지만 위대했던 저항

 현관부터 지하철까지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나, 둘, 셋, 넷・・・ 마흔 둘, 마흔 셋. 그만 포기했다. 미소 짓는 경비원을 지나쳐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는 더 아찔했다. 일단 사방에 흩어져 있는 CCTV는 더이상 셀 수조차 없었다. ‘괜히 의식했어, 괜히.’ 지은 죄도 없는데 어깨가 자연스레 앞으로 말렸다. 스스로 검열하게 된다. 분명 시민의 안전 확보과 범죄 예방, 대테러 방지를 위한 것이라지만‘CCTV공화국’ 싱가포르에서 왜 빅브라더가 떠오르는 것일까. ‘전쟁은 평화, 자유는 속박, 무지는 힘(War is peace,Freedom is slavery, Ignorance is strength)’ 빅 브라더의 불편한 슬로건도 같이. 


 중국은 대체로 우려스럽다. 조지 오웰의<동물농장>과  <1984>를 대륙에서 읽다간 공안이 잡아갈지도 모른다. 금서로 지정된 탓에 읽을 기회가 전무하지만 원래 존재하지 않는 책이라면 모를까 금서라니 21세기에. 더구나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임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지난해 국가 주석이 5년씩 두 번 최대 10년 집권할 수 있는2연임 제한 헌법 규정을 삭제했다. 시진핑의 파워가 막강하다. 공산당 내부에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2023년 이후에도 영화 곰돌이 푸는 극장에서 상영될 수 없을 듯 하다. 


 텔레스크린이나 곤봉으로 대표되는 물리적 감시나 고문보다도 역사와 언어를 통제하는 빅 브라더의 지배 방식이 더 무섭다. <1984> 속 역사 통제는 신어(Newspeak)를 통한 이중 사고(double thinking)에 의해 가능한데 이중 사고는 두 개의 모순된 개념을 동시에 주입하고 두 개념을 모두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를 고치면 사람들은 기억을 잊어버리고 고친 사실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매 순간마다 수정된 과거가 현재가 되어 버리는 비극이 지속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라는 슬로건과 상응한다. 스노든의 폭로로 드러난 미정보국의 무차별적인 개인정보 수집 실태나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 대선 개입 사건도 결국 과거와 현재를 교묘히 통제하는 소설 속 빅브라더의 권력 유지 방식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통제에 대한 반항으로 주인공 윈스턴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일기를 쓰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혁명 전삶이 어떠했는지 기록하려고 애쓴다. 당장 전날 본 영화 내용 등 시시콜콜한 일상부터 써내려 간다. 법이 없는 사회라불법은 아니지만 발각되면 사형을 면치 못한다는 것도 알면서 용기를 내본다. 하지만 “어떻게 미래와 소통할 수 있을까.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미래가 현재와 비슷하다면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현재와 다르다면 그의 수난의 기록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라며 이중 사고에 갖힌 자신을 발견한다. 윈스턴의 임무가 기록국에서 과거의 기록을 지우고 다시 쓰는 일이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사랑에 빠진다. 윈스턴은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고백하는 당당한 줄리아를 만난다. 줄리아의 신조는 ‘규칙을어기면서 계속 살아남는 것이었다’.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운, 민첩성, 대담성만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순진한 구석이 있는 캐릭터다. 당은 성 행위로부터 얻어지는 모든 쾌락을 통제하는 곳으로 남녀는 출산 목적 이외에는결혼도 할 수 없다. 이런 설정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The Handmaid’s tale)와도 오버랩된다. 둘은 차링턴의고물상 2층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동거한다. 사랑이 곧 타락이 되는 사회에서 ‘그들의 포옹은 일종의 전투였으며, 절정은 승리의 순간이었다. 그것은 당에게 가할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행위였다.’  


 세 번째로 협력자를 찾는다. 비록 그 정체가 모호했어도. 윈스턴은 줄리아와 비밀 혁명단체인 형제단에 가입하겠다며오브라이언을 찾아간다. 오브라이언을 동지로서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책 어디에도 발견할 수 없는데 윈스턴은 그의지적이고 신뢰가는 풍모를 바탕으로 자기 암시를 할 뿐이다. 여러번 읽었지만 끝까지 오브라이언의 정체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오브라이언이 이중 첩자였는지, 아니면 보여지는 대로 내부 당원이었는지, 빅 브라더였는지 확언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윈스턴을 ‘마지막 인간’이요, ‘인간 정신의 수호자’라고 인정하는 동시에 고문으로 마지막 남은 윈스턴의 인간성을 무참히 뭉게버린 것도 그였다. 진심으로 정체를 재차 물어보고 싶게 만드는 인물이다. 


 집필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오웰은 깊은 절망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미얀마에서 경찰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으면서 제국주의 참상을 목격했고 영국으로 귀국 후엔 거리를 전전하며 비참한 밑바닥 인생을 체험한다. 민주적 사회주의 실현을꿈꿨던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지만 파시즘이 득세하는 과정을 다시 목격했다. 그리고 혁명 정신이 사라진 러시아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적인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디스토피아를 떠올렸을 것이다. 위태로웠지만 위대했던 윈스턴의 마지막 모습에서 패배하는 인간, 오웰 자신을 발견했을 듯 해 더 슬프다. 하지만 나는 반항을 멈추고 체제에 순응하고야 마는 윈스턴으로부터 하찮지만 승리하는 인간을 읽는다. 줄리아로부터 <1984>를 정치 소설이아니라 연애소설로 읽을 가능성을 발견한다. 차링턴과 오브라이언에게서 사상경찰 같은 필요악의 평범성을 발견하는것으로부터 거꾸로 ‘희망’을 읽는다. 


 <1984>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이다. 오웰이 상상했던 35년 후나 35년 전을 회상하는 지금이나. 오웰의 미래는 디스토피아였고 예언한 시간의 거리 만큼 과거의 디스토피아를 되돌아봐야하는 지금도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와 계속 멀어져 간다. 1949-1984-2019. 1984년을 기준으로 시간을 접어보면 절묘하게도 데칼코마니 같이 겹치는 상황들이 많다. 오웰의 예언이 적중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2054년 즈음 다시 읽어볼 참이다. 전쟁은 비극, 자유는 의지, 무지는죄.


조지 오웰의 <1984>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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