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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애 Nov 01. 2020

우리는 거짓이고
원래는 하나였다

[작가의작가]15.도전 : 잔혹, 재미, 혼돈의 삼중주

 없는데 있었고 사실인데 허구인 품격있는 거짓말이 궁금하다면 이 글을 그만 읽어 달라. 우선, 발음이 비슷해서 아가사 크리스티와 헷갈리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에 대해 궁금하다면, 구글링을 해보고 이 칼럼을 계속 읽어도 좋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볼 계획이면 이 지면을 잠시 덮고 책부터 펼치자. 책이란 경험재이므로 읽어보지 않고는 그 가치를 모른다 하지만 독서 방법은 단순히 취향의 차이라 해두고 싶다. 약간의 배경 지식을 갖고 책을 고르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제목과 표지가 마음에 들거나 아니면 장르적 선호에 따라 책을 고를 수도 있다. 책의 내용에 대해 일말의 정보도 없이, 기대나 실망도 없이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다가 우연히 집어든 책에서 재미를 발견할 수 도 있다. 벌써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읽어볼까’라는 기대감이 생겼다고 봐도 무방할지. 선택의 여지는 아직 남았다. 이 글을 그만 읽어 달라.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작가의 작가’ 칼럼에 가장 부합하는 작가다. 헝가리라는 다소 낯선 동유럽 국가의 생경한 작가를 알게 된 건 소설가 은희경의 강연에서다. “최근 읽는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꼽았다. “쌍둥이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짧게 언급했지만 당대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외국 작가의 존재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기에 충분했다. 동심은 아득했고 뇌와 옆구리엔 허영과 위선으로 뭉친 지방이 붙어가는 미성숙한 ‘어른이’였기에 <새의 선물>의 주인공 진희의 모습에서,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의 모모와 J.D.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에서 오히려 어른스러운 성숙함을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천진한 관찰자의 시선과 치기어린 무책임한 반항이 사무쳐서. 


 비밀노트(상), 타인의 증거(중), 50년간의 고독(하) 3부작으로 이뤄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1993년 낱권 형태로 초판이 출간된 후 절판 됐다가 지난 2014년 한 권으로 묶어 개정판이 나왔다. 이 글은 구판 기준이다. 제목이 몹쓸 스포일러일 수 있지만 눈치 빠른 독자라면 서사를 헝크는 작가의 의도를 일찌감치 발견할 수 있다. 3부작은 시간 간격을 두고 차례로 출간됐다는 점만 제외하면 연작물도 아니라 각각 읽어도 무방하다. 기시감이 드는 인물들의 등장과 대사를 쫓아가면서 나중에야 파악되는 행동의 의미를 천천히 더듬는 묘미가 있다. 여전히 어디가 거짓말이고 사실인지 구분이 안가는 부분이 있다면 (하)편을 다시 읽기를 추천한다. 


 쌍둥이 어린이가 주인공이라기에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옥희의 앙증맞은 시선을 기대했다간 된통 당한다. ‘비밀노트(상)’는 잔혹함의 정도가 장난이 아니다. 상상가능한 모든 폭력이 등장하는 탓이다. 빠르게 읽히는 와중에 휙휙 지나가는 수간, 강간, 윤간의 장면이나, 인지상정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가족 관계나, 살인, 근친상간, 유아성애, 동성애, 변태 성욕 등을 가진 결함 투성이 인물들의 이야기가 9세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어린이의 눈을 통해 펼쳐진다. 그렇다고 작가는 일련의 인물들을 유치하거나 천격하게 다루지 않는다. 전쟁을 배경삼아 최소한의 인간성이 어떻게 파괴되는 지 짧고 굵게 보여줄 뿐이다. 강한 문장을 통해서. 


 이 소설의 문장은 속도와 무게가 비례한다. 강한 문장은 장황한 설명없이 행동과 대사로 이뤄져서 가독성이 훌륭하다. 형용사나 부사, 접속사 사용을 최대한 배제한 덕분에 문장은 짧고 어린이 작문처럼 보인다. 그래서 빨리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묵직하다. 감정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비밀노트(상)’에 이름도 없이 ‘우리’라고만 등장하는 쌍둥이는 실체부터 묘연하다. 둘이면서 하나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들만의 신체단련, 정신훈련, 귀머거리 훈련, 구걸 연습에서 위악를 배울 수 있다. 특히 ‘우리’의 공부와 훈련에서 간결한 문장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엿볼 수 있다. 위악을 배우는 슬픔은 덤이다.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 못했음’을 결정하는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중략)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를 닮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략)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비밀노트’ 우리의 공부 中>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욕을 하도록 행동하고는, 우리가 정말 끄덕없는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옛날에 듣던 말들이 생각났다. 엄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내 행복! 금쪽 같은 내 새끼들!(중략) 이런 말들은 잊어야 한다. 아제 아무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추억은 우리가 간직하기에 너무 힘겨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정신 훈련을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말했다. -난 너희를 사랑해, 난 영원히 너희를 떠나지 않을 거야.(중략) 반복하다보니 이런 말들도 차츰 그 의미를 읽고 그것들이 가져다주던 고통도 줄어들었다.” <‘비밀노트’ 정신훈련 中>


 짧고 강렬한 문장 이면에는 작가의 개인사가 숨어있다. 자칭 ‘문맹’이라는 작가는 모국어를 사용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살았다. 헝가리에서 태어나 2차 대전을 겪고, 소련 반체제 혁명에 연루된 남편을 따라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갔다가, 난민으로 스위스에 정착해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렸다. 유년 시절엔 나치의 지배로 독일어를 쓰다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러시아어로, 종국엔 스위스에서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녀의 글쓰기는 ‘한 문맹의 도전’이였다. 상황만 바꿔 보면, 만약 작가가 일제 강점기에 유년시절을 일본어를 쓰면서 보내고 지배자의 만행을 피해 연해주로 넘어가 노역에 시달리다 다시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고 러시아어로 작품 활동하는 상황이라면, 막연한 가정을 근거로 장르적 사각지대에 놓인 이민 문학을 통해 짐작이 안되는 삶의 궤적을 따라 재외동포의 삶과 애환을 짐작해 본다. 분명 공통의 정서가 있다.


 대담한 묘사와 독특한 결말 덕분에 ‘비밀노트(상)’는 자체로도 완결된 하나의 작품으로 읽힌다. 3부작은 각각 쌍둥이의 유년과 헤어짐-클라우스(Claus)로 산 루카스의 청소년기- 재회로 전개된다. ‘타인의 증거’(중)’에서 펼쳐지는 루카스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 ‘50년간의 고독(하)’에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과 쌍둥이의 재회는 거짓-거짓-거짓, 거짓-거짓-진실로도 읽혀서 읽는 내내 카오스다. 맥락을 따라 거짓말 연습을 해보자면, 우리는 거짓이고 원래는 하나였다. 루카스는 클라우스고 클라우스는 루카스다. 엄마는 클라우스를 사랑하고 루카스는 아버지와 함께다. ‘기괴하지만 재밌다’를 두서없이 적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제발, 이 글을 그만 읽어 달라.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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