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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애 Nov 01. 2020

'우주의 어린이' 지구에 왔다감

 [작가의작가] 16. 동심 : 우리가 진짜 잃어버린 것

#1.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전시 작품을 소개하러 나온 도슨트 선생님이에요. 오늘 많이 덥죠? 바다 너머 보이는 공장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제철소고요. 앞에 보이는 이 작품은 OO작가의 OO이라는 작품인데요. 소재는... 의미는... 숨은 이야기가... 있고요." 

"선생님! 너무 더운데요. 선생님! 화장실 가고 싶은데요. 선생님! 물은요? 선생님! 숨바꼭질 해도 돼요?" 

"오늘 모래가 너무 뜨거우니까 그늘에서 잠깐 물 마시면서 쉬고 다른 작품들을 볼까요?"


 30분이 30년 같은 순간이었다. 도슨트를 너무 쉽게 봤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아닌 야외에서 3차원 설치 작품들을 그러니까 밤톨 같은 유치원생들을 데리고 주조, 압연, 절삭 같은 가공법이니, 어느 작가가 누구와 콜라보레이션을 해서 만들었다느니, 나도 도무지 이해 안가는 어려운 작품 제목을 구구절절 설명해서야 통할 리가 없었다. 가을이라지만 9월의 오전 11시의 모래사장은 데일 만큼 뜨거웠고 다른 전시관이었던 냉동창고도 눅눅한 반 세기 세월의 때때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러니까 유치원생들을 데리고 해변을 걸으며 작품을 설명해주고 축제의 취지를 전한다는 낭만적인 생각은 어디까지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주최측 안내에 따라 몇몇 유치원을 맞이하고 잠시 멘붕을 겪고서야 감이 왔다. 접근부터 틀렸다는 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거창한 사조를 들이대지 않아도 관람자의 시선, 새까맣게 잊고 지냈던 호기심 가득한 순수한 동심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지 다시 곱씹어 보았다.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자. 지역 신화가 있다. 같이 웃을 수 있는 이야기를 준비하고 웃겨보자. 슬랩스틱도 있다. 친구 조카라 생각하고 같이 놀자. 질문하면 집중한다. 인솔과 안전관리는 선생님들께 부탁하고 내 역할에 집중한다. 유아교육 전문가는 따로 있다.' 초반에 이불킥했던 전달력이 조금씩 개선되고 궁극적으로 4~7세가 전시물을 재밌게 볼 수 있도록 생각의 여지를 줬더니 신이 났다. 오히려 내가 컸다.


 #2. 성장을 위해서는 경험만한 것도 없지만 경험의 양이 늘면 늘수록 시인 로르카가 말한 동심이라는 '전설로 무르익고/ 깃 달린 모자와/ 나무칼로 무르익은/ 어린 시절의 영혼'은 세월의 통제에 자꾸 삭아 사라져간다. 늘 호기심 어린 눈으로 늘 새로움에 감탄과 환희를 맛보던 그런 순간들도 시들해져가고 잊어버린 동심 때문에 상상력도 점점 고갈돼 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작가의 작가 6.놀이편 참고>에 등장하는 체셔 고양이와 미친 모자장수등장에 애들은 거침없이 깔깔깔 웃어대지만 거기서 명제 논리를 분석하고 나서야 웃을 수 있는 나를 발견하면 얼치기 어른이 된 기분이 든다. 에드워드 노튼이 영화 버드맨에서 엠마 스톤에게 "너의 눈을 뽑아서 젊고 순진한 눈으로 이 도시를 보고 싶다."는 대사에 움찔하게 되는 이유다. 


 이럴 때마다 펼쳐 드는 책이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다. 이미 결론을 아는 데도 이야기가 끝이 나질 않길 페이지를 아껴 아껴가며 천천히 천천히 한 장 한 장씩 넘기는 유일한 책이다. 마지막으로 읽은 게 2013년 한 이벤트 회사에서 프로모션으로 제작한 손바닥 크기 보다 작은 미니북이었으니까 벌써 7년 만이다. 시간의 힘을 견디고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어린 왕자를 이 시점에 다시 소환해 보는 것은 서문이 주는 울림 때문이다. '이제 어른이 된 예전의 어린이에게 이 책을 바친다. 모든 어른은 한 때 어린이였다. 대부분 그걸 잊어버렸지만.' 익숙한 데 마치 첨 보는 것 처럼 낯선 서문을 읽자마자 그동안 잊고 지낸 어린 왕자의 여정들이 불연듯 떠올랐다. 기억 너머의 이야기는 내게 체화된 전설로 무르익어 있었다. 


  전설로 기억된 어린이의 세계는 어른의 언어로 건널 수 없었다.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듯이 분석 가능한 세계가 아니었다. 어린 왕자는 '자기가 길들인 것만 알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준 여우와 친구되기를 잊은 채 뱀을 따라 나섰다. 지구와 달리 왕-허영쟁이-술꾼-사업가-가로등지기-학자가 사는 별에는 소외되고 부조리한 어른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지 앞서 목격했다. 사막은 또 어떤가. 사랑이 넘치기 보다 사랑이 요구되는 장소다. 정신적 유대를 나눌 수 있는 존재도 제한적이다. 어린왕자도 더이상 천진난만할 수 없었을 터다. 뱀의 존재가 새삼스럽다.


 <어린 왕자>는 160여 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돼 있고, 국내는 1971년 처음 출간된 이래로 2018년까지 단행본만 총 297권이 출간됐다. 이외에도 영화와 연극, 뮤지컬로도 즐길 수 있고 일본엔 박물관이 있어 장르불문, 국가불문,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을 받고 있다. 싱가포르 우표 박물관(Singapore Philatelic Museum)에서도 어린왕자에 관련된 전시를 즐길 수 있는데 지난 3월 18일부터 연말까지 보수 공사에 들어간다니 다음 방문은 내년으로 미뤄야할 것 같다. 어린 왕자를 사랑하는 두터운 팬층과 전세계에 분포하는 충성도 높은 콜렉터들이 있어 앞으로 어떤 언어로 새로운 버전이 나올지 주목된다.


 #3.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위로 구슬땀을 뚝뚝 흘리면서 "선생님 덥지요?"하며 고사리 손 부채질이다. 5살짜리가 다 큰 어른을 챙긴다. 물병도 건넸다. 쓰담쓰담. 그새 길들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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