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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애 Nov 01. 2020

K방역, 박수칠 때 드는 서늘한 깨달음

[작가의작가]17.재난 : 시대 전환을 이끈 최초의 근대 소설

 혼란에 휩싸인 사람들은 짐을 싸 도망가기 바쁘고 물건을 사재러 온 사람들로 시장은 북새통이다. 또 가족의 안녕을 빌기 위해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부적을 파는 성직자나 가짜 약을 파는 약장수도 등장했다.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 불안에 떤 사람들은 마치 공포영화 공식처럼 맨 먼저 희생자가 됐다. 보다 못한 정부는 비상 체제를 선포하고 모임을 자제시키고 예배를 금지했다. 학교엔 전부 휴교령을 내렸다. 또 권역을 나눠 사람들을 통제했다. 특히 감염자는 집에 가족들과 격리시킨 다음 이를 어기고 외출할 땐 사형에 처혔다. 검찰원, 감시인, 조사원들이 격리자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여긴 대체 어딜까. 코로나 바이러스의 진원지인 우한도, 확진자가 폭발적이었던 밀라노도 혼돈의 맨하탄도 아니다. 300여 년전 런던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로 유명한 대니얼 디포는 1722년 출간한  <전염병 연대기>에서 1665년에서 1666년 가래톳 페스트가 강타한 런던의 일상을 보여준다. 당시 런던은 18개월 동안 도시인구 1/4에 달하는 10만 명이 목숨을 잃어 대재앙이라고도 불리운 카오스를 겪었다. 선페스트라 불리는 가래톳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디포는 5살에 불과했지만 기록과 개인의 기억, 삼촌의 일기, 거기에 상상력을 덧붙여 대재앙의 모습을 생생히 전달한다.


 이 책이 병마에 시달리다 희망마저 잃고 인간의 존엄마저 상실된 아비규환의 런던의 모습만 보여줬다면 그 가치가 반감됐을 것이다. 중년의 H.F.라는 화자의 어투는 다소 교조적이고 문맥도 현대 영어와 달라 가독성이 좋진 않다. 대신 미래 세대를 위한 희망의 작가정신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의 서사를 천천히 따라가보길 권한다. 책의 서두에 "이 기록을 단순한 글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귀중한 지표로 삼아 주었으면 해서 일부러 남겨두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밝힌다. 희미한 기억만 남아있는 무서운 전염병을 생생히 복기한다는 것은 문제점을 성찰하고, 대안을 찾아 병을 정복해내고야 말 미래 사회를 기대하는 디포의 바람이 담겨 있기도 하다.


 시체가 넘쳐나는 도시의 카오스를 직시하면서도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깊이 파고드는 서사는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다. 소설이라지만 르포에 가까워 디포가 문학가인 동시에 저널리스트였음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디포의 기록은 혼돈보다 엄격한 질서에 집중한다. 규율과 통제가 개인의 삶에 침투해 재난의 혼란을 잠재워 주는 권력의 이면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미셸 푸코도 <감시와 처벌>에서 생명에 대한 권력의 탄생을 지적한다. 제3장 일망 감시방법에는 "과거에 페스트를 둘러싼 축제의 내용을 다룬 허구적인 문학이 있었다. 거기서는 법률이 중단되고, 법의 금지사항은 해제되며, 광란의 시간이 흐르고, 육체는 제멋대로 뒤섞이고, 개인은 가면을 벗어버리고, 지위를 드러내는 신분이나 고유한 그의 특징으로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을 던져 버린 채 그야말로 완전히 다른 진실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러나 또한 그 것과는 정반대되는 페스트의 정치적 몽상도 있었다. 즉, 집단적인 축제가 아니라 엄격한 분할이 있고, 법률 위반이 아니라 권력의 모세관과도 같은 운용을 보장해주는 완전한 위계질서 체계를 매개로, 인간 존재의 가장 세밀한 부분에까지 규칙이 침투해 들어가는 현상이 있다."고 했다.


 가장 반발이 심했던 것은 감염자와 비감염 가족들을 한 집에 가두고 출입을 통제한 조치였다. 디포도 "가옥 폐쇄 는 중대한 과오"였다고 고백하면서도 "규율을 시행으로 생기는 개인적 손해는 모두 공공선을 위해 감수해야"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가옥폐쇄보다 더 위험한 건 무증상 확진자로부터 전염병이 퍼진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자신이 확진자라는 것을 모르고 '걸어다니는 저승사자'로서 행동했던 것이 실로 비극"이라고 했다.


 1665년 런던 페스트는 시기적으로 중세까지의 페스트와는 양상이 달랐다. 중세 페스트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불문하고 모두가 걸리는 병이었다. 그러나 런던 페스트는 도시 구역별로 사망자수가 다르게 나타났다. 성 밖의 빈민, 흑인, 아일랜드인 거주 구역의 피해가 성내보다 컸다. 전염병은 가난해서 생계를 위해 일을 놓을 수 없는 하층민들에게 더욱 가혹했다. 병자를 운반하고 시체를 매장하고 청소 등 비천한 일의 몫은 그들이 맡았고 도시의 공간은 세분화되고 폐쇄되고, 개인들은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목숨을 건다'는 뜻은 다름이 아니라 운반인들은 직업상 시체에 접근하거나 직접 만져야 하기 때문에 병균이 옮아 속속 죽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중략) 살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중략) 그런 일을 할 사람을 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만일 구하지 못했더라면 죽은 사람들의 유해가 땅 위에서 뒹군 채 썩어 가는 지옥의 광경을 연출했을 것이다." 앞서 말한 전염병의 계급성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당시 의사들은 감염성 차이가 거주지 특성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주거 조건을 개혁해 발병과 전파, 확산의 상관관계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도시 하층민의 건강상태는 사회문제로 인식되고 도시환경과 위생조건을 개선하는 근대적 공중위생 개념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런 개념이 근대 방역법 체계를 잡는 계기가 된다. 격리를 통해 예방해야 할 것은 개인이 아니라 공간이요, 예방에서 중요한 것은 격리가 아니라 공간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면 공간을 관리해야하는 주체는 누구며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이 꼬리를 문다.


 방역 올림픽을 방풀케 하는 각국의 COVID-19에 대응하는 외신을 접하면 가장 효과적인 방역을 이끌낸 국가로 중국을 꼽는다. 국경 폐쇄, 감염자 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 등 중국의 상황은 1665년 런던시와 모습이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시민의 자유는 고려 대상이 아니라 푸코가 그려낸 "통치가들이 완벽한 규율을 적용시키기 위해 꿈 꿔온" 대재앙의 도시, 페스트 도시로 완벽하게 빙의했다. 반면에 미국은 개인과 자유가 극단적 이기주의로 치달아 야단이다. 여기는 공공선이 고려 대상이다. 신천지 교인 확산 이후 확진자 동선공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추방과 자가격리, 대신 범죄와 폭동 없는 사회 안전망, 팬데믹 속에서 치러진 총선. 이태원 클럽 확진. 그러면 한국은 중국과 미국 그 중간 어디쯤 위치해 있나.


  K-방역을 자화자찬하면서 같이 박수 칠 때 우리가 외면하고 놓쳐버린 것은 없는지 다시 질문해야 할 것들에 대한 서늘한 깨달음이 왔을 때 또 한 번 전율이 인다. 50년 후 COVID-19은 어떻게 기억될지.


대니얼 디포의 <전염병 연대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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