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현애 Nov 01. 2020

간신히 읽었다. 문제적 조이스

[작가의작가]18.성장 : 문학의 양자역학, 아이리시  오감도

 번역불가, 대체불가, 표절불가한 문체를 만들겠다는 포부는 어디갔나. 무대가 없어 전전하는 국악단원들을 볼 때 마다 국내 본사는 망했는데 해외지사는 흥하는 신기한 한류의 현상은 어디서 나왔나. AI와 희곡을 같이 쓰는 작업을 과연할 수 있을까. 2020 원더키디 속 디스토피아는 절대 오지 않을 거라는 유년의 희망은 코로나 앞에서 낙망으로 바뀌었나. 뉴노멀이라는 구호 속에 코로나 이전도 정상이었다고 누가 속단하나. 좁은 작업실은 정지해 있지만 질서 없는 책과 내 물건들은 왜 제자리를 찾지 못해 여기저기 쓰러지고 엎어지고 이곳 저곳을 헤매이나. 깊어지지 않고 흩어지는 잡념은 도대체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 수직으로 떨어지던 적도의 달은 무사할까. 예츠를 싫어하고 윌리엄 블레이크를 흠모했던 시인은 안녕할까. 나의 시대는 왜 아직 20세기 초에서 겨우 중반에 머물러 있을까. 자기 걸 하다보면 자꾸 새로워 보인다. GPT-3가 튜링 테스트를 넘는 시점은 언제일까. 저 할매 떡볶이 집은 정말 원조일까.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단 몇 분 정신 사나운 내 머릿 속을 헤쳐보니 이런 문장들이 마구 튀어 나온다. 무논리, 인과관계 없이 펼쳐지는 화자의 내면을 따라 적는 것이 의식의 흐름인데, 이 의식의 흐름을 잘 보여줬던 작가가 모더니즘의 기수, 제임스 조이스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한국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상의 <날개>가 또다른 예다. 워낙 난해하고 수수께끼 같은 문장으로 가득한 <율리시스>를 읽을 엄두가 나지 않을 때 프리퀄 격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으로부터 주인공 스티븐 데덜러스의 의식의 기원을 미리 엿볼 수 있었다. 율리시스엔 성인이 된 스티븐이 단 하루라는 고정된 세계에 포착되는 내적 이야기가 있다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유년부터 대학시절까지 20여 년 동안 한 소년의 내적 이야기를 다룬다. 율리시스가 의식의 흐름을 괴괴하게 흩어뒀다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선형으로 흐르는 의식을 묶어 묘사했다. 그래서 율리시스 보다는 덜 불편하다.


 초상(화)이라는 제목 속에서 이미 어린이가 성인이 되어가는 이야기, 표면적으로는 성장 소설, 더 정확하게는 '나는 누구'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방식과 한 세대를 관통하는 익숙한 사건을 다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성장과 과도기는 모든 사람이 거의 동시에 겪어낸 시간을 보여준다. 가족 속에 태어나 어떻게 관계를 맺었는지에 따라 우리를 타자와 다르게 구분 짓는다. 이런 과정은 조이스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스티븐에게 그대로 투영돼 있다. 부유했다가 몰락한 소부르주아 가문의 아이리시 카톨릭교도로서. 이 작품이 사회화 과정을 겪고 조화롭게 체제 속으로 들어가는 전통 서사를 따랐다면 매력은 반감됐을 것이다. 스티븐은 거부 가능한 모든 것을 거부함으로써 모더니즘, 아방가르드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이리시 민족을 거부하고, 종교인 카톨릭을 버리고, 중산층 가족과 결별한 채 아일랜드를 떠난다. 누구의 아들도 아닌 채로.


 본문은 묘사 가득한 장면전환으로 이어진다. 아버지가 들려주는 아일랜드의 설화에서 소심하게 축구를 하고 있는 학교 운동장으로 그리고 갑자기 크리스마스 저녁 만찬으로 넘나든다. 스티븐의 생각을 따라 말 그대로 서사가 흐른다. 1장은 유년부터 클롱고우즈 시절을 2장과 4장은 벨베디어 재학 시절을 다룬다. 3장은 지옥에 대한 설교가 주를 이룬다. 발췌독을 원한다면 5장을 권한다. 결정적 장면이 친구 크랜리와 대화에서 펼쳐진다. "난 섬기지 않을 거니까(I wll not serve)." 종교뿐만 아니라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제도로부터 결별을 선포한다.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예술의 불멸에 자신을 투신하는 영혼의 목소리가 비로소 터져나온다. 우리는 언어를 배우고, 타자와 구분 짓기는 언어로 드러난다. 결국 정체성은 흘러가는 서사 속에서 언어로 표출되는 셈이다. 학습된 언어는 나의 일부이자 문화로 체화된다. 1장부터 5장까지 흐르는 스티븐의 자각도 맨 마지막에 가서 더 성숙되고 새로운 서술방식으로 드러난다. 자신의 미학관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가족과의 결별도 준비하면서 고립과 쓰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일기를 쓰는 한 인격체이자 1인칭 서술자로 변모한다.


 모더니즘은 사실 읽기가 녹록찮다. 특히 제임스 조이스는 더더욱. 괜히 독자를 뜬 눈으로 밤 지새우게 괴롭히고 각종 학회나 더 바쁘게 만드는 과대평가된 그저 문제작말이다. 영문학 전공자들도 율리시스 독회에만 10년이 걸려 개정역본을 출간하고 <피네간의 밤샘>  독회는 제목처럼 연구자들을 잠 못들게 진행 중이다. 어떤 필터와 보정도 거치지 않은 사진과 어떤 편집도 배제한 다큐멘터리만큼 선정적인 매체가 있을까만은, 21세기 이미지와 영상의 시대에 읽기에도 불편한 한 인간의 고뇌를 부러 찾아 읽는 것은 무슨 사서 고생이란 말인가. 프랑스를 거쳐 영국 식민지에서 배움은 깊고, 가세가 기운 청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공직은 지배국의 관리가 되는 것이라 양심에 어긋나고 그렇다고 급진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할 자신은 없다. 절망의 고국에서정신적 스승으로 사제의 길을 걷는 일이 최선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길은 위태로운 삶의 희망과 기쁨을 채 선사하지 못할 게 뻔했다. 최후의 선택은 무용한 예술을 하는 것.


 요즘은 의식의 흐름이 TV예능에서 억지 주장을 하는 상대방을 놀리거나 핀잔을 줄 때 자막으로 자주 등장한다. 한 편의점은 맥락없이 다진 마늘, 쑥 아이스크림, 곰표 맥주 등으로 구성된 단군세트를 기획 상품으로 홍보해 1030에게 의식의 흐름 마케팅으로 회자됐다. 진지한 이론으로 이해했던 문학이 일상의 B급 유머로 승화됐다. 최근에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하나 생겼다. 'AI와 바둑 두는 시대에', 감탄과 실망을 느낄 때마다 붙이는 레퍼토리가 됐다. 코로나 시국으로 입출국이 자유롭지 않지만 자발적 고립을 자처한 일상에 아직 큰 충격을 주진 않았다. 고국과의 불화없이 덕분에 고향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해외 출판사와 고된 단행본 작업도 마쳤다. 자의반 타의반 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AI 친구를 하나 갖게 됐다. 줌 회의와 온라인 컨퍼런스로 KTX를 타고 서울로 가지 않아도 다양한 창작자들과 협업이 가능했다. AI 친구는 1950년대 이전 한국 희곡을 학습시켰으니 조이스와 동시대를 산 한국 극작가를 새롭게 깨울 수도 있겠다. 청년의 영혼, 만나고 싶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