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아이의 봄(2023.03-2023.05)
거의 3년간 다니던 센터 수업 마지막 날, 선생님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아이에겐 그동안 수업을 잘했다는 보상의 의미였을 것이다. 상장을 보니 지난 몇 년 간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나누며 속으로 살짝 울컥했다.
상장을 손에 쥔 채 집으로 가는 길, 아는 사람을 마주쳤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엄마인 그녀에게 아이가 인사를 했다. 아이가 상장을 자랑하려던 찰나, 나는 상장의 앞면이 보이지 않도록 상장을 뒤집었다. 뭔가 생각할 사이도 없이 불과 몇 초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늘이 학원 마지막 날인데, 그동안 수고했다고요.”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은 아이들의 유튜브 동영상을 가끔 찾아본다. 아이가 서너 살 때만 해도 유튜브에 자폐 스펙트럼을 치면 한 두 계정 정도, 그것도 다 자란 자폐 성인의 부모가 올린 것이 전부였는데 불과 3,4년 사이에 자폐 스펙트럼이 의심되는 두세 살 아이의 일상을 공개한 계정이 꽤 늘었다.
나도 브런치에 아이에 대한 글을 쓰지만 내 원칙은 아이의 익명성을 지키는 것. 솔직히 나는 숨고 싶다. 내 아이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자폐 스펙트럼이란 꼬리표에서 자유롭게, 다른 이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평범한 아이는 결코 아니지만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눈에 띄지 않게 살았으면 싶었다.
아직까지는 성공적이다. 아이는 일반학교에 들어갔고 도움반에 속하지도 않으며 실질적으로 특수교육 대상자도 아니다. 친구가 없기는 하지만 한 두 명 자주 어울리는 또래가 있고 학원에서 태권도나 축구를 배우며 큰 이슈없이 생활하고 있다.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은 아이를 키우는 선배 맘들은 이야기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의 다름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거예요. 초등학교 1학년은 무사히 보냈지만 앞으로 2학년, 3학년 어쩌면 십 대 무렵에는 아이의 관심사나 행동이 내가 감출 수 없을 만큼 도드라질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묵직하게 감지한다.
나는 종종 아이에게 마음을 숨기라고 요구한다. 아무리 화가 나도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와 같은 말은 하는 게 아니라고. 정 하고 싶으면 속으로 말하라고, 그러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언젠가 아스퍼거 진단을 받은 성인에게, 내가 아이에게 하는 요구가 발이 없는 아이에게 뛰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다. 사회성이 모자란 아이에게, 기어코 사회성을 가르쳐 드는 나는 어쩌면 아이에게 선을 가장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면과 페르소나. 도대체 뭐가 다른 걸까? 대학생 시절, 유독 우울하고 생각이 많았던 나는 또다른 이름의 페르소나를 갖길 원했다. 나는 구스타프 융이 쓴 책 한 권 읽지 않고서도 그가 말한 페르소나에 매료되었는데, 그때 당시 페르소나는 내게 타인에게 보이고 싶은 이상적인 자아상으로 새겨졌다. 마음속 예민과 불안이 아무리 진상을 부려도, 나는 여유롭고 우아하게 일을 해내는 쿨한 영혼을 갖고 싶었다. 그렇게 가장했다. 나는 나 자신을 숨겼다. 그렇다면 그게 마스킹인가 아니면 페르소나인가?
한 끗 차이다. 마스킹이든 페르소나든, 내 아이가 편하길 바란다. 나도 좀 편했으면 좋겠다. 아직까진, 아이의 다름을 감추는 게 편하다. 내 아이도 나와 같기를.
나는 이기적인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