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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리 Mar 24. 2023

침묵

아홉 살 아이의 봄(2023.03-2023.05)



아이에 대한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마.
감정이 휘몰아칠 땐 감정을 숨기는 게 낫지.
그러니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이의 초등학교에서 도서회 모임을 하고 있다.


매주 한 번씩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일찍 등교한 아이들을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주는 봉사 활동이다. 이 모임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학교에 들어올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학교에 출입이 불가했던 학부모로서, 학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었다. 학교 분위기도 느끼고 싶었고 도서관도 궁금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싶다가 아니라,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가고 싶다는 이유로 도서회 활동을 시작했지만, 책을 읽어주는 당번이 아님에도 빠지지 않고 학교 도서관에 갔다. 아이와 함께 교문을 통과하는 기분도 좋았다.


적게는 열댓 명, 많게는 서른 명 가까운 아이들 앞에 나가서 마이크를 켜고 그림책을 읽어 주었다. 내가 책을 읽어 주는 날은 몇 번 되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아이는 맨 앞 줄에 앉아 엄마가 읽는 책을 들었다. 지금까지는 별 다른 문제가 없었다. 가끔 독후활동으로 하는 퀴즈를 맞히지 못해, 사탕을 못 받았다고 칭얼거리고 눈물을 쏟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조용하게 넘어갔다.


그런데 바로 오늘,  내가 책을 읽어주는 타이밍에 아이가 소란을 피웠다. 단상에 올라 책을 읽어주려는 찰나, 아이가 내 쪽으로 다가와 물었다.

"엄마, 감사 일기 책가방에 넣었어?"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거기에 도서회 학부모 몇 명이 서 있는 그곳에서! 나는 나중에 확인해 보자고 말했다.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이는 몇 번 짜증을 내는 듯하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와중에 다른 친구가 아이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내가 맡은 자리야."

나는 못 들은 체하고 책을 읽어 나갔다. 학부모 중 한 두 분이 아이를 제지하고, 내가 선 바로 단상 옆에 자리를 마련했다. 아이가 뭐라고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난감한 포즈를 취하는 학부모를 슬쩍 바라보았다. 나는 계속 책을 읽었다. 아이가 짜증을 부렸다. 나는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이가 의자를 옮겨와 바로 내 앞에 앉았다. 바로 뒤에 있는 아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한 학부모가 말렸으나 아이는 그 자리를 고집했다. 나는 계속 책을 읽었다. 3,4학년 정도 보이는 여자 아이가 다가와 아이에게 말했다.

"여기 앉으면 안 돼. 다른 아이들이 안 보이잖아."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계속 책을 읽었다. 책을 다 읽은 뒤 따로 준비한 독후활동이 있었다.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종이에 야광 불빛을 비추면 글자가 나타나는 것을 준비했었다. 다른 학부모에게 이 활동을 맡기고 아이를 데리고 나오려고 했지만, 아이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집에서 나와 함께 미리 작업한 종이를, 뭐라고 쓰여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그 종이를, 맨 앞에 서서 고집스레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손을 꽉 잡은 채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네가 뭘 잘못한 지 알지? 엄마가 다 말하지 않을게. 교실에 올라가서 한번 생각해 봐."

아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사실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엄마가 사람들 앞에서 책 읽는 시간이잖아. 그럴 때 엄마한테 와서 물어보면 안 되지. 그건 나를 방해하는 거야."

나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기 자리도 아닌 데 맨 앞 앉아 있으면 그것도 다른 사람 방해하는 거야. 엄마는 오늘 너한테 많이 실망했어."


아이를 교실로 보내고 가방을 가지러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이후에는 책을 읽은 사람이 자신이 읽은 책을 소개하고 소감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나는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친분이 있는 학부모에게 맡기고 바로 나가려다 다시 돌아왔다. 한 학부모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워~ 진정하셔요." 또 다른 학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엄마를 독차지하려고 했나 봐요. 오늘 너무 혼내지 마세요." 나는 가만히 그곳에 있었다. 내가 나가면 이 일이 더 커질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마무리해야 한다. 내가 여기에서 무너지면 안 된다.


마음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요동쳤다. "오늘은 제 아이가 빌런이네요."라는 유머 섞인 말로 넘어가고 싶기도 했다. "아이가 부족한 점이 많아요. 제가 잘 가르칠게요."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내, 눈물이 고였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책 소개를 하고 소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나는 아이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책 내용만 간단하게 요약하고 독후활동을 간단히 소개한 뒤 마무리했다. 모임이 끝난 뒤,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오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러 사람 앞에서 아이가 심통을 부린 것, 그뿐이다. 아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버릇이 없다. 심술궂다. 튀는 행동을 한다."와 같은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사람들은 남일에 대해 생각보다 관심이 없다.  지금 당장은 화제에 올리더라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곧 잊힐 것이다.



나는 나를 칭찬한다. 침묵한 나를.
더 큰 말이 나오지 않도록,
그 자리에서 꿋꿋이 버틴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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