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아이의 겨울(2022.12-2023.02)
너의 가능성
나의 판단
지난 4주간, 조호바루 한달살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루이틀은 사촌 형과 신나게 놀다가, 약 3주간은 사촌 형이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을 정도로 서로 부딪히는 일의 반복, 그리고 나머지 사나흘은 기적처럼 적당한 타협과 완만한 평화가 찾아왔다.
연간회원권으로 시간 날 때마다 찾았던 레고랜드. 아이는 이제 점수가 나는 슈팅 어트랙션에 오르지 않는다. 온전히 아이의 선택으로.
"형은 '닌자고'를 타러 갈 거래.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
"나는 타지 않을 거야."
"그래? 그럼 우리는 다른 거 타러 가자."
"나는 저기 높이 올라가는 '타워'에 타고 싶어."
"잘 생각했어. 속상할 것 같으면 아예 타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나는 아이를 칭찬했다. 다음으로 VR장치를 끼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놀이기구에 도착했다. 아이는 키가 130cm이 넘지 않아 VR을 착용할 수 없었는데, 처음에는 “왜 나는 안되느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VR롤러코스터가 너무 재미있어서 한번 더 타겠다는 사촌형을 두고 아이가 내게 말했다.
"나중에 내가 형처럼 크면 그때는 VR을 할 수 있을 거야."
이런 일은 몇 번 더 있었다. 늘 1번을 고수하던 아이는 형이 1번이라고 쓰인 기차의 첫 칸을 차지하자, 이내 다음 칸으로 이동해 앉았다. 앞만 볼 수 있던 1번 칸과는 달리 2번 칸은 서로 마주 보고 앉을 수 있었는데, 아이는 달리는 방향과 반대로 앉아 "나는 뒤를 보고 탈 수 있다."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얼떨결에 자리를 양보하긴 했지만 2번 칸의 장점을 찾는 아이의 모습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사촌형 또한 달라진 점이 눈에 보였다. 아이가 우는 소리를 낼 때마다 "왜 그래?"라며 아이에게 조근조근 묻기 시작했고 아이는 이내 짜증을 거뒀다.
두 아이는 정말 형제처럼 각자의 엄마에게 똑같이 말했다.
"나 오늘 형(동생)이랑 한 번도 싸우지 않았어."
아이의 변화가 순식간에 찾아온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아이는 이건 정말 하지 못할 거야. 그렇게 타고난 아이니까 절대 기대하지 말자.'라고 이미 아이에 대한 판단을 해 버릴 때도 많았다. '자폐 스펙트럼 진단이 허투루 나온 건 아니겠지. 넘지 못할 한계가 분명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아이의 가능성을 깎아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아이는 내가 생각했던 어려운 일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갔다. 단어 한마디 못할 것 같던 아이는 서너 달 만에 단어는 물론 문장을 구사했다. 소통이라곤 하지 못했던 아이가 이젠 내 눈을 바라보며 애교를 피운다. 힘없이 몸을 흔들거리며 걷던 아이는 실내 클라이밍에 도전할 정도로 탄탄한 힘을 자랑한다. 여덟 살이 되도록 누가 밀어주기 전에는 혼자 그네를 타지 못하던 아이가 친구와 함께 놀이터를 돌아다니면서 그네 타는 법을 터득했다. 바로 지난 가을의 일이었다. 나는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이런 변화가 놀랍다.
여전히 갈 길은 멀다. 형과의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루 이틀 좋다가 또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어쩌면 더 좋지 않은 모습으로 퇴행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 한 번 해봤다는 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과 천지차이니까.
아이를 믿어야 한다.
미리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