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아이의 봄(2023.03-2023.05)
아이는 다른 사람의 표현이나 책에서 읽은 문장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경향이 있다.
앵무새처럼 따라 말하는 듯 보이지만 마치 밑간을 하듯 살짝 바꾸어 말하는 데다가, 그 말이 상황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언어를 배우는 데 모방과 암기가 필요한 만큼, 이 같은 능력을 언어적 강점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이가 행동도 따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며칠 전, 어깨가 욱신거려 모처럼 뜨거운 물을 받아 욕조에 누웠다. 책을 읽고 있던 아이가 빼꼼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가 씻어 줄게." 아이는 바구니에 물을 담아 내 어깨 위에 끼얹어 주었다. 살짝 귀찮기도 했지만 엄마의 목욕을 도와주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보여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몇 번 하는 듯하다가 이제 대충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아이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다시 몇 분뒤 아이가 욕실로 들어와 이번에는 머리를 감겨 주겠다고 한다.
"엄마, 내가 엄마 머리에 물 뿌릴 테니까 숨을 꼭 참아. 숨을 못 참을 것 같으면 손을 들어야 해!"
어디에선가 보던 대사와 장면이었다. 이건, 조호바루 한달살이를 할 때 사촌 형이 아이의 머리를 감겨주며 하던 말이었다. 이중 일부는 내가 아이의 머리를 감겨 줄 때 아이가 내뱉던 말이기도 했다.
"엄마! 내가 손을 위로 들면 엄마가 샤워기를 멈춰야 해!"
뭔가 작고 따뜻한 것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나는 다정한 엄마는 아니었다. 대신 목표를 향해 부지런히 나아가는 엄마였다. 마라톤에 임하는 페이스 메이커처럼 아이가 가야 할 방향과 속도를 가이드해 주는. 나는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이 뚝뚝 떨어질 만큼 살가운 감정을 아이와 교류하는 일은 드물었다.
일례로 아이를 키우면서 한 번도 목욕을 같이 해본 적이 없다. 아이가 한 두 살 아주 어렸을 때에도 함께 목욕을 하지 않았다. 그건 언제나 남편 몫이었다. 아이가 목욕을 하는 동안은 온전히 홀로 쉬고 싶었다. 나는 아이와 제대로 놀아준 적도 없다. 대신 아이를 앞에 앉혀두고 노는 법을 가르쳤다. 소꿉놀이 장난감을 가지고 "햄버거 먹어. 냠냠 쩝쩝! 아 맛있다. 이번엔 주스 마셔."라고 말하며 놀았다. 그곳에 웃음 따위는 없었다. 그건 모두 의무이자 숙제였다.
그런데 아이가 사촌형이 했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 누군가의 작은 행동을 아이가 그대로 따라한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다. 누군가의 친절을 받다 보면, 그와 같은 친절을 따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더라도 습관적으로라도 말이다.
오늘 아이의 행동에 엄마의 목욕을 돕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그저 사촌형이 했던 행동을 모방한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아이가 내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며칠 전 김상현 작가의 '당신은 결국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을 읽었다. 이삼십 대를 타깃으로 한 책이었지만 제목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아이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너는 결국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 그전에 내가 이런 사람이 되기로 했다. 나는 결국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 아이에게 이런 나를 보여주고 싶다. 증명해 내고 싶다.
그럼 아이도 나를 따라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