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4 아이의 겨울(2025.12-2026.02)
며칠 전 성장병원에 다녀왔다.
사춘기가 곧 시작될 것 같다는 말을 개인병원에서 들은 후 두 번째로 찾은 병원이었다. 첫 번째 병원에서는 사춘기 호르몬이 분비되고 있고 골 나이도 또래보다 1년 이상 빨라서 키 손실이 예상된다고 했다. 최종 키는 168cm 정도, 지금 바로 성장호르몬을 맞춰서 키를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이가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았는데 앞으로 약물치료를 할 수도 있어서요. 약물과 성장호르몬을 병행해도 괜찮나요?"
"아마도 아빌리파이를 먹겠군요. 그럼 살이 좀 찔 수도 있는데, 사실 성장호르몬 주사하고는 상관없어요."
잔잔한 파도가 서서히 밀려왔다가 밀려나가듯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아이의 진단을 밝히는 일이 이제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곳이 저렸다. 약물치료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성장호르몬 고민까지 해야 하는구나. 솔직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성장병원에 가지 말 걸, 괜한 것을 알아서 고민을 사는가 싶었다. 자식 하나 키우는데 왜 이리도 걸리는 게 많은지.
168cm. 남자에게는 작은 키지만 그렇다고 치료를 받아야 할 큼은 아니지 않냐고 남편에게 토로했다. 그건 추정 키일뿐이야. 성장판을 자극하는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도 최종 키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어. 이건 남편의 생각이었다. 고기를 싫어하는 아이게게 붉은 고기를 먹이자고 제안한 것도 남편이었다. 식단도 균형 있게 짜고 10시 전에 자고 운동도 열심히 하면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남편의 말을 믿고 싶었다. 성장호르몬 주사는 맞히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이 그랬다. 아이를 위해 뭔가 더 애쓰고 싶지 않았다. 인위적인 것이라면 더더욱. 그건 아직까지 끝나지 않는 조기개입으로도 충분했다. 때마다 있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와 약물 복용에 대한 고민, 사회성을 끌어올리는 수업만으로도 벅찼다. 친구 관계나 앞으로 마주해야 할 학업에 대한 걱정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성장호르몬 치료에 대한 결정을 미루려는 듯 대학병원을 예약했다. 보수적인 의견을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참 애매한 경우예요. 어머님 의지가 강하면 성장호르몬 치료를 바로 시작할 수도 있는데 어떠세요?"
"아이가 다른 문제로 병원에 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키까지 억지로 키워야 하나, 의문이 들어요."
"사실 이게 치료라고 보기는 힘들어요. 사춘기가 곧 시작되겠지만 또래보다 빠른 사춘기이지, 그게 막 이상할 정도는 아니거든요."
옆에서 듣던 아이가 의사 선생님의 말을 가로채며 자기는 키가 크고 싶다고, 주사를 맞을 거라고 채근했다. 진료실이라는 사실에도 개의치 않고 아이가 징징댔다. 나는 키가 크고 싶어. 바로 주사 맞을 거야. 자꾸 한숨이 새어 나왔다. 너는 뭐 하나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구나.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은 사실과 키가 작을 수 있다는 예상은 기실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런데도 자꾸 억울했다. 나는 왜, 왜, 왜, 이렇게 모든 것이 힘들까. 앞으로 또, 또, 또 어떤 힘든 일을 겪게 될까. 의사 선생님은 사춘기가 시작됐는지 확실하게 알려면 자극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힐 생각이 없으면 사실 이 검사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렇게 시간을 내어 병원에 올 필요도 없다고도 덧붙였다.
언제나 그렇듯 결정은 우리 몫이다.
ps. 나는 키가 152cm고 사춘기도 굉장히 일찍 왔다. 남편은 175cm로 고등학생 때 20cm 넘게 자랐다고 했다. 너의 빠른 사춘기의 원인은 다름 아닌 '나'다. 그저 미안한 엄마가. 그래도 자신있게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