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김선재, 조미현, 김미리, 정혜경
느린학습자 자녀를 키운 네 명의 엄마가 쓴 기록을 책으로 엮었다.
아이들은 모두 자라 성인이 되었다. 김선재 님의 아들은 서른 후반의 비정규직 최저임금 노동자로 지내고 있고, 조미현 님의 딸은 대학 졸업 후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김미리 님의 딸은 서른 이후부터 서울시 느린학습자 교육지원센터(밈센터)를 이용하고 있고, 정혜경 님의 아들은 공익근무를 통해 모은 돈으로 일본여행을 다녀왔다. 현재 구직활동 중이다.
"장애인 등록이 있으면 취업할 수 있어요." 이와 비슷한 문장이 여러 번 나온다. 우리나라는 장애인 의무고용제도가 있고 장애인 등록이 된다면 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장애인 법정 의무고용률을 지키는 기업은 반도 채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장애인 등록을 바라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들이 장애인이 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제도에서 느린학습자는 장애인 등록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IQ75 혹은 80까지를 경도장애로 정해 장애인 취업 특혜를 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는 유난히 엄격하게 IQ70-84까지를 경계선 장애로 지정하여 아무런 취업 특혜를 주지 않는다. (중략)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경계선 자식을 위해 자영업을 선택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자영업의 폐업률이 높은 상태에서 그것은 같이 망해가는 길이지 함께 사는 길이 아니다. 80p
평균 지능 80은 장애 등급 대상이 아니다. 더군다나 검사 항목 중 한 부분이라도 정상지능이 나오면 장애 등급을 받을 수 없다. 240p
자폐 스펙트럼 장애도 비슷하다. 경증은 장애인 등록이 불가하다. 제도적으로 장애인이 아니지만 사회적 지원이 절실하다. 학교만 보내봐도 알 수 있다. 무시나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물론 학교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공교롭게도 책을 쓴 두 명의 엄마는 아이들을 일반학교 대신 대안학교에 보냈다. 일반학교를 졸업한 두 아이도 학창 시절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친구도 없었을뿐더러 또래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나마 학폭을 당해도 학교 다닐 때가 나았어요"라는 어느 느린학습자 부모의 말은 뼈아프다. 학교에서는 학폭을 당해도 중재하거나 제재할 심판이 있고 정해진 공간 안에서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학교 졸업 이후 느린학습자는 도움을 줄 사람도 도움을 받을 곳도 없다.
아이가 서 있는 곳은 정글 같은 세상이다. 비장애 청년에 비해 사리분별이 안 되고, 판단 능력이 떨어지니 뉴스에서 들리는 수많은 범죄에 이용될까 걱정이 커진다. 그전에야 미성년자니까 어느 정도 보호받지만 장애 등록도 어려운 상태다 보니 범죄에 이용당해도 보호받을 제도가 전후무후한 상태다. 사회성 부족으로 친구 맺기가 원활하지 못하지만, 누구보다 관계를 지향하는 아이들이고 인정욕구가 크다 보니 범죄의 먹잇감이 될 소지가 매우 크다. 74p
우리 아이들은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 있다. 꼬리표를 달더라도 사회 보호 안에 있기 위해 장애인증을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꼬리표를 달지 않고 사각지대의 위험에 노출된 채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나마 시기를 놓치면 장애인증을 만들기도 어려워지니 어느 것도 제대로 된 해결책은 아니다. 어떤 선택이든 우리 아이들은 힘들다. 124-125p
지능지수 70에서 84에 해당하는 경계선 지적장애. 느린학습자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학습을 하거나 사회적 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들이 자라 어떤 일을 겪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느린학습자는 통계상으로 13.5%에 달한다. 운이 좋은 경우라면 부모가 일찍이 깨닫고 아이에게 여러 개입을 하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이에 해당하지 않는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자랄까. 사회에서 소외된 채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사실 내 주변에도 느린학습자가 있다. 큰고모의 아들, 나에겐 사촌 오빠. 나보다 대여섯 살 정도 많은데 내가 어렸을 땐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만나 어울리곤 했다. 내 기억에 사촌오빠는 말이 조금 어눌한 정도, 그 외 다를 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촌오빠를 만나는 일은 줄었고 언젠가부터 그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집안 행사는 매해 비슷한 주기를 두고 있었지만 큰고모는 사촌오빠 없이 당신 홀로 다니곤 했다.
"사지 멀쩡한데 아이를 집에만 두지 말고 직업 교육이라도 받게 하면 좋을 텐데요." 친정 엄마가 친척 분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가 여전히 큰고모와 함께 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일이긴 하지만 사촌오빠가 게임이나 운세 등 유로 전화 서비스에 빠져서 한 달 전화비가 100만 원이 훌쩍 넘었다는 말도 흘려 들었다. 어느덧 사촌오빠는 쉰 살, 여전히 큰고모와 단 둘이 살고 있다. (큰고모부는 오래전 돌아가셨다.)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만 생각했지 그 외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아이의 경우 경증이긴 하지만 이 사회에서 경증이란 게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주 무거워고 종종 버거워서 모든 걸 놓고 싶었다. 경계선 지능인, 느린학습자의 삶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누가 더 힘들고 힘들지 않고는 함부로 비교할 수 없다. 직접 겪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느린학습자의 삶을 책을 통해서나마 경험하게 해 줘서 감사하다.
이렇게 치열한 양육 이야기를 읽으며 미리 걱정하고 포기하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책 속 주인공들의 학창 시절에 비해 지금은 느린학습자에 대한 지원과 인식이 훨씬 더 좋아졌고 법안 제정 등 정책 마련의 움직임도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목소리를 내고 요구해 느린학습자가 더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음을 기억하고 느린학습자를 잘 키워내기 위한 작은 노력에 동참해 주기를 감히 청해봅니다. 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