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거북선생 May 15. 2021

존경하는 Y 선생님

국어 선생이 되니 더 보이는 것들.

학창 시절 12년간 여러분의 선생님들을 겪었지만, 내가 국어 선생이 된 후로 더 특별하게 생각되는 선생님을 딱 한 분 꼽자면 바로 Y 선생님이다. 당시 보통의 공립 인문계 고등학교였던 우리 학교에서 대다수 선생님들은 정해진 한 학년 정도만 맡으셔서 학년이 올라가면 수업을 들을 일이 없었다. 그중에 몇몇 소수의 선생님들만 우리와 함께 학년을 올라오곤 하셨는데 Y 선생님도 그렇게 3년 동안 우리의 국어 선생님으로 계셨다. 국어과목의 수업 시수가 많은 편이라서 때로는 담임 선생님보다 더 오래 함께 시간을 보냈던 분이었다. 게다가 유독 담임선생님 복은 없었던 탓에 나는 졸업식 때 Y 선생님께만 작은 꽃 화분을 선물해 드렸다. (꽃을 좋아하셔서 Y 선생님 책상 주변은 온통 꽃화분이었다. 당시 만원도 안되던 아주 작은 꽃화분이었지만 내 맘이 그날 그분께 뭐라도 드리고 싶어서 남은 용돈으로 급히 샀던 기억이 난다.)


Y 선생님은 수업 종이 울리는 순간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이후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바로 지각 처리할 만큼 엄격하셨다. (물론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증명하고 기록을 지울 수 있었다.) 3년간 수업 시간을 엄격하게 지키시는 선생님의 태도는 변함이 없으셨다. 처음에는 따르기 어려워했던 애들도 시간이 흐르니 당연히 지켜야 할 시간으로 인식했다. 수업 시간을 지켜서 들어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 다른 과목의 경우 일 이 분 정도라면 적당히 넘어가는 경우가 흔했다. 매 수업마다 그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고 사유를 체크하는 일은 사실 교사에게 번거로운 일인데 Y 선생님은 3년간 한결같으셨다. 최소한 우리가 본 3년간 Y 선생님의 수업 시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선생님이 정한 규칙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불평 부당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어느 학생이 따르지 않을까. 그런데 수업을 하는 교실에서 규칙을 세우고 그것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내가 선생이 되어 보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선생 스스로가 자신에게 가장 엄격해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엄격하게 시간을 체크하시던 선생님은 은근한 카리스마가 있으셨다. 어쩌면 처음부터 엄격하게 시간을 관리하시니 아이들이 긴장을 하고 수업을 시작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남녀공학에 다소 거친 남자아이들도 있었던 1학년 교실에서 남자아이들의 난동(?)이 없었던 수업이 선생님의 수업시간이었다. 물론 아이들이 졸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완전히 엎드려 자는 아이들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한 번도 언성을 높여서 화를 내신 적은 없었다.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지만, 최소한 우리 반 남학생들이 절대 얌전하게 수업만 듣는 아이들이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게 기억한다. 담임이 화가 나 집어던지던 출석부와 1년 동안 세 번이나 깨졌던 교실 유리창, 담임에게 혼나서 화가 난다고 청소도구함을 박살 냈던 남학생, 걸핏하면 아이들을 때리던 수학 선생과 매시간 신경전을 벌이며 맞던 아이들, 만만하다 싶은 수업 시간엔 많은 수가 대놓고 엎드려 자던 교실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교실에서 국어 수업은 조용히 진행되었다. 내 수업도 애들이 잘 따르기야 하지만 내 경우는 사교육인 데다 나는 무섭게 소리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분은 3년간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높여 화내신 적이 없었다. 천방지축인 아이들을 두고 큰소리 없이 통제하는 그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지금 나에겐 너무도 부러운 능력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무척이나 오래되었음에도 그 말씀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심지어 그날 교실 풍경이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가득하며 당시 배우던 작품까지 기억이 난다. (그날 배운 작품은 ‘가을의 기도’였다.) 평소처럼 선생님은 작품에 나오는 구절을 우리에게 질문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슨 뜻 같은지 묻는 질문이었다. 수업시간에 자주 있는 풍경이었다. 아이들이 아주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은 자주 물으셨다. 그날 내가 했던 대답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답이 틀린 것만큼은 분명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 답에 그렇게 답하셨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그 순간을 기억한 덕분에 내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문학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알았고, Y 선생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깨닫기도 했다. 요즘은 많이 달라지기야 했다지만 여전히 우리의 교육은 시험지에서 정해진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문학은 수학과 다르게 명쾌한 하나의 답이 정해져 나오지 않는다. 내 학생 하나가 매번 화를 내는 이유도 그것이다. 이것도 말이 되고 저것도 말이 된다고 말이다. 대학에서 고전시가를 수업하던 때, 달달 외우다시피 배웠던 작품의 다른 해석을 접하고 기가 막혔던 적이 있었다. 만일 고등학교 때 Y 선생님이 너의 답은 틀렸다고 하셨다면 나는 아마 그 순간 깊은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문학은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고 다양한 접근이 있을 수 있다는 것. Y 선생님은 단 한 번도 아이들의 답을 오답으로 칭하지 않으심으로 우리를 가르치셨다. Y 선생님은 나의 해석을 굳이 오답이라고 말씀하시는 대신 보다 논리적인 근거를 찾아낼 수 있도록 지도하셨다. 그런데 수업 시간에 그렇게 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이것도 저것도 다 답이 된다는 학생에게 논리적인 근거를 대어서 길을 찾아 주는 일은 너무 어렵다. 시험을 위해 하나의 답을 정해주고 그것을 암기시키면 사실 수업은 쉬워진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문학을 보는 눈은 평생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저 하늘이 이상이라고 하니까 이상인 거고, 해가 등장하면 왕이라니까 왕인 거다. 이유는 없다. 근데 그건 문학이 아니다. 단순히 암기를 반복하면 당장 배운 작품을 복습해서 보는 내신 시험은 잘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 보는 문학 작품은 절대로 풀 수가 없다. 모르는 작가고 모르는 작품이니 말이다. 국어는 일정 부분 암기가 필요하겠지만 수능시험에서 국어는 사고력을 요구한다. 생각해야 한다. 논리를 찾고 의미를 찾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니 사실 Y 선생님처럼 학생 스스로 생각하고 해석의 방향을 잡도록 하는 교육이 진짜 문학 교육이다. 근데 그게 참 어렵다. 내가 직접 해 보니 정말 어렵다. 그래서 그분이 다시금 또 존경스럽다. 그분 덕에 내가 문학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 국문학을 배우지 않고, 국어 선생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문학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 주심에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민한 나도 아이들이 문학을 즐기게 해 주고 싶다. 점수를 위한 공부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즐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노력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Y 선생님은 어떻게 그걸 다 하셨을까 자주 생각하곤 한다.


아이들을 통해서 듣다 보면 가끔 성의 없는 수업을 하는 교사들을 본다. 자기 학교 선생님을 월급루팡으로 치부하는 아이들도 봤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의 교실에도 그런 선생님들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그때의 Y 선생님을 더 존경하게 된다. 당시 우리 학교의 한 학년은 약 500여 명이었다. 적으면 140명, 많아도 250명인 지금의 현실에서 생각해보면 엄청난 인원수다. 그 시절 내 국어책이나 노트를 보면 Y 선생님께 받았던 프린트들이 넘친다. 어떤 것은 조금 조잡하게 스크랩된 사진을 복사하신 것도 있고, 어떤 것들은 잘 정리된 표가 만들어져 있는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자료가 차고 넘치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국어 시간에 했던 글쓰기다. Y 선생님의 글쓰기 과제는 꽤 자주 있었다. 적어도 한 학기에 4~5번은 써서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이 짧은 글인 경우도 있었지만, A4를 앞뒤로 꽉꽉 채울 만큼 길었던 적도 있었다. 보통 수업 중에 작성해서 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Y 선생님은 문단 구분에 있어서 철저하셨다.  띄어쓰기, 맞춤법이 틀린 것이 있으면 하나하나 첨삭을 해서 돌려주시고는 했었는데, 내가 썼던 글이 내용은 괜찮은데 띄어쓰기가 엉망이라서 만점을 줄 수 없다고 하셨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에는 살짝 억울했던 일이라서 기억한다. 칭찬을 받을 줄 알고 냈던 글이 잔뜩 빨간 표시가 되어 돌아왔으니 어린 맘에 그랬다. 이게 일이 되고 보니, 한 학년에 오백 명씩 교실마다 들어가서 글쓰기 과제를 내주셨던 그분이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의 글을 첨삭하면서 몇 시간을 보내셨을까 생각하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얼마나 수고로운 일이었을까. 아이들의 그 많은 글들을 읽으며 하나하나 첨삭을 하면서 말이다. 일 년 정도 논술 첨삭지도를 했었는데, 하루에 열 명 남짓 되는 아이들을 첨삭하는 일만으로도 피곤했었다. 아이들 글을 한 삼십 개쯤 연달아 읽다 보면 그 길이가 짧고 길고의 문제를 떠나서 눈이 피로하고 집중도 안 된다. 맘 같아선 가벼운 실수는 대충 넘겨주고 싶은 유혹도 든다. 그런데 그분은 오백여명의 학생을 한 학기 내내 첨삭해주셨다. 당시엔 토요일까지 수업을 했으니 그분이 얼마나 바쁘셨을지는 상상도 안 된다. 그 오백여명의 아이들이 모두 전문 작가가 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 절반은 들여 쓰기와 문단 구분을 확실하게 하는 대학생이 되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글쓰기 과제를 나눠주시면서 그 말씀을 반복적으로 하셔서 당시 우리 반 아이들이 그것 하나만은 잘 지키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우선 그것만 잘 지켜도 기본 점수는 받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대학 신입생들은 그걸 잘 못 한다. (1학년 공통 교양으로 글쓰기 수업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내 대학 1학년 때 첫 과제를 검토하신 교수님이 그 문제로 학생들을 혼내셔서 알았다. 명색이 인문대생들만 있었는데도 그런 문제로 혼난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니 아주 중요한 공부였다. 당시에 우리는 아무도 몰랐고, 귀찮아하거나 짜증을 내던 친구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정작 귀찮고 짜증이 나셨을 분은 그분이셨음을 내가 선생이 되고 보니 알겠다. (고3 때 담임교사도 안 해주던 교사추천서를 내 친구에게 써 주신 분이기도 했다. 당시 그분은 파릇한 젊은이가 아니었으며, 과부장까지 하셨으니 그분에게 사생활은 있었을지 의심이 들 지경이다.)


한 번은 내가 고등학교 동창에게 Y 선생님이 너무 좋은 분이었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친구는 수업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는 답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국어 선생이 되었기에 더 보이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게 인간적으로 친밀하고 정을 나눈 선생님들도 있고 그래서 오래 좋아하고 기억하는 분들도 많다. 그분들에 비하면 Y 선생님은 어쩌면 나와 덜 친밀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분이 얼마나 훌륭한 국어 선생님이셨는지 몰랐을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분을 좋아했을 거라는 확신은 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해주신 그 말이 아직도 기억에 오롯하니 말이다.     


사랑을 할 때 두 손으로 하지 말아라.
한 손만 사랑에 담그고, 한 손은 남겨서 너희를 위해서 쓰렴.


문학 선생님이 하신 말씀 치고는 낭만적이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엔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사랑하라는 귀한 뜻이 있었다. 그보다 더 귀한 가르침이 어디 있을까. 어른이 되어보니 알겠다. 그분이 얼마나 존경스러운 어른인지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그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