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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북선생 May 15. 2022

선생님은 꿈이 선생님이셨어요?

선생님은 꿈이 선생님이셨어요?


응. 선생님은 원래 꿈이 선생님이었어. 다만 지금 하고 있는 '학원 국어' 선생님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유치원 때부터 나는 아주 다양한 활동을 했었어. 우리 엄마가 나에게 이것저것 시도하는 걸 즐기셨거든. 미술학원, 웅변학원 심지어 연기학원까지 다녀봤어. 덕분에 아주 짧지만 아역 배우 생활도 했었지. 아주 좀 더 정확하게는 아역 엑스트라였지만 말이야. 물론 그건 내 꿈이 아니었어. 일곱 살의 나는 아주 어렸지만, 엄마에게 그 일이 싫다고 말했어. 우리 엄마는 내가 싫어하는 일을 시키는 분은 아니셨기 때문에 바로 그만두었지. 대부분의 과외 활동은 내가 싫다고 하는 순간 그만두었어. 최단기간 그만둔 활동은 피아노였지. 중고 전자피아노까지 구해다 주셨던 아빠에겐 너무 미안했지만, 나는 정말 피아노 학원이 싫었어. 대부분의 활동은 그렇게 나를 스쳐갔어. 그런 내가 가장 오랫동안 했던 것은 미술이었지. 놀랍게도 지금 나의 그림실력은 완전 꽝이지만 말이야. 그래서 초등학교 때 나는 어렴풋이 '화가'같은 꿈을 꾸기도 했었지. 내 꿈이 화가라고 말을 했던 건 아니지만 그림 그리는 일이 너무 좋아서 그냥 이걸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정도였어.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 무렵. 한 책이 내 인생을 흔들었단다.


『시험도 숙제도 성적표도 없는 학교 서머힐』


어린 눈에 매우 자극적인 제목이던 그 책은 나에게 너무 큰 울림이었어. 입시생도 아닌 고작 초등학교 4학년짜리 꼬마였지만, 난 자유롭게 열려 있는 서머힐학교를 꿈꿨어. 아이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이 학교의 학생이길 바랐지. 성적표에 시달리거나 부모님이 학업을 압박하셨던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나는 당시 학교에 불만이 많은 꼬마였던 거야. 사실 나는 꽤 오랫동안 그랬어. 학교는 내 눈에 온통 부당한 것 투성이었지. 특히 선생님들에 대한 불만이 많았어. 사실 내 초등학교 6년은 선생님들과의 악연으로 도배되어 있을 정도였어. 


엄마 말이 초등학교 2학년 때 내가 잠깐 등교 거부를 했었데. 이유 없이 그럴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엄마가 나에게 물었더니 담임선생님이 나만 혼을 낸다고 했다는 거야. 엄마가 나를 며칠 달래 보아도 소용이 없으니, 어린 우리 엄마는 언니(이모)에게 조언을 구했지. 이모의 해결책은 아주 정확하게 통해서 나는 다시 웃으며 학교를 다녔다고 해. 이모의 해결책? 내 손에 담임의 선물을 들려 등교시키는 거였지. 그건 악어가죽 가방이었어. 명품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90년대에 10만 원 가까이하는 가방은 평생 미싱사로 산 우리 엄마에겐 손 떨리는 물건이었지. 엄마 인생에서 처음 사보는 비싼 핸드백이 나를 위해 담임에게 보내는 뇌물이었던 거야. 고작 9살이었던 어린 나에게 학교가 참 상처였던 거지. 요즘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땐 그랬어. 


이후로도 나는 학교에서 좋지 않은 일이 많았어.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나와 같은 조에 속해 있던 아이들이 일으킨 문제로 교내 한자 경시 대회 상장이 '금상'에서 '은상'으로 바뀐 적도 있었지. 담임 선생님이 직접 수정액으로 고친 상장을 들고 와서 나는 집에서 억울함을 호소해야 했었어. 그건 개별적으로 참여한 경시대회였고, 나는 같은 조의 아이들이 서로 커닝을 하는 줄도 몰랐어. 시험을 볼 때는 가림막을 세워두고 봤으니까 말이야. 담임은 내 해명은 듣지도 않았지. 나를 지적한 당시 그 반 우등생의 말은 믿었으면서 말이야. 우습게도 그 커닝 사건의 주범은 그 아이였는데 말이지. 한 번은 담임에게 이유 없이 맞아서 양호실에 누워있게 된 적도 있었어. 나는 몸집이 작은 아이였고, 무방비 상태로 갑자기 뒤에서 날아든 공격이었거든. 난 그때도 지금도 왜 내가 맞았는지 이유를 몰라. 그날 교실 뒤에서 치고받고 싸우던 남학생들은 놔두고, 왜 뒤돌아 본 나를 때린 걸까? 아이들 소란에 나만 뒤를 돌아봤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담임은 나를 때린 이유도 안 알려줬지만, 나에게 사과를 하지도 않았어. 중학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초등학교를 나왔음에도, 내가 졸업 후에 찾아뵌 선생님이 양호선생님이 유일했을 정도로 내 초등학교 시절은 썩 좋지 못했어. (양호 선생님만이 그때 나를 위로해주시던 유일한 분이었어.) 그런 것들이 어린 나에게 아주 큰 상처였던 거 같아. 그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의 가사만 해도 이랬으니 말 다했지 뭐. 그때 난 겨우 12살이었는데 말이야.


세월이 흘러 학교에 가게 된 나 행복에 시작이라 생각한 나
기쁨도 잠시뿐 모두가 나를 무시했고
그 잘난 선생조차 나를 싫어했고
그것 참 뻔했지 난 돈이 없었지 흥! 뻔뻔했지

H.O.T. '홀로서기' 중


나중에 어른이 되고서야 '서머힐'학교는 일반 학교가 아니 '대안 학교'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 나는 어렸기 때문에 그저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서머힐'의 교장선생님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지. 그러다가 중학교 1학년이 되었는데, 우리 담임선생님은 너무 좋은 분이었어. 중학교엔 선생님이 참 많으셨고, 과목별로 호불호가 갈렸어. 당시엔 체벌이 남아 있었고, 심한 체벌을 해서 문제가 될 정도의 교사도 있었어. 하지만 중학교 3년간 나는 꽤나 담임복이 있었어. 마치 초등학교 6년을 보상받듯이 내 담임선생님들은 다 좋았어. 1학년 담임 선생님은 '도덕'선생님이었어. 당시엔 학교 성적에 수행평가 점수가 그렇게 높게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우리 학교는 비교적 그런 활동을 많이 하는 편이었어. '도덕'시간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발표를 함에 있어서 아주 열심이었지. 엄마가 유치원 때 보낸 웅변학원과 연기학원이 빛을 발하던 순간들이었어. 도덕 선생님은 우리 조 발표를 특히나 마음에 들어 하셨고, 발표를 위해 녹화를 했던 비디오를 영구 소장하여 교육자료로 쓰시겠다고까지 하셨지. 그래서 그때 나는 나중에 '도덕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 물론 그건 딱 일 년짜리 꿈이었어. 중학교 2학년이 되고 보니 나는 확실히 '국어'과목이 더 재미가 있었거든. 중학교 3학년 때는 내가 좋아하던 국어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이 되셔서 더 좋았어. 그때 '국어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거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서머힐 학교를 꿈꾸고 있었어. 한창 사춘기였던 중학생일 때, 나는 여러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역할을 했었어. 그 덕분인지 그때의 친구들과 나는 여전히 사이가 좋아. 내 인생의 친구들을 그 무렵에 얻었다고 생각해. 사춘기 아이들의 고민은 비슷하면서도 특별했어. 나도 같은 아이면서 내가 뭐라고 그렇게 친구들을 상담해 주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난 그 시간들이 너무 좋았어.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는 게 좋았거든. 그러면서 생각했어. 왜 우리에겐 서머힐의 선생님처럼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이 없을까 하고 말이야.


그 뒤로 줄곧 꿈이 바뀌지 않았냐면 그렇지는 않아.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우리와 함께 첫출발을 한 국어 선생님이 계셨어. 그분은 우리 학교 국어 선생님의 제자이기도 하셨지. 국어 선생님의 제자가 국어 선생님이 되어서 같은 학교로 발령을 받아 오신 거야. 햇병아리 선생님이었지만 그 국어 선생님도 너무 좋았어. 수업을 정말 깔끔하게 진행하셨지. 그래도 확실히 멋있었던 것은 스승이신 국어 선생님이셨지. 고등학교 3년 내내 나의 국어 선생님이었던 내가 가장 존경하는 Y 선생님이 바로 그분이셔. 그러면서 내 머릿속의 선생님은 이미지가 조금 바뀌었어. 정말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 Y 선생님처럼 완벽하게 멋진 그런 선생님 말이야. Y 선생님과 수업을 하면서 나는 문학을 정말 사랑하게 되었어. 뿐만 아니라 글쓰기도 너무 좋아졌지. 그때 Y 선생님이 내가 썼던 글들을 칭찬해 주셨던 말씀들이 지금도 오롯이 다 마음에 남아 있어. 국어 선생님들 중에는 작가이신 분들도 꽤 계시니까 그럼 나도 글을 쓰는 국어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Y 선생님의 제자였던 국어 선생님 같은 제자가 되고 싶어서 햇병아리 선생님과 같은 대학을 꿈꾸기도 했었어.


인생이 모두 계획대로 흘러가고 바라는 것을 다 이룰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목표로 했던 사범대학은 가지 못했지. 초등교사는 단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지만, 당연히 성적도 안되었어. 그렇다고 바로 포기하지는 않았어. 교직이수를 하고 임용고시를 보면 선생님이 될 수야 있었으니까.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 나는 뒤늦은 사춘기를 겪어야 했어. 목표로 한 입시에 실패했다는 것이 나를 꽤나 정신적으로 힘들게 했어. 개인적인 상황들도 문제가 되어서 정서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었지. 자세히 말하기 힘들 정도로 내 인생에서 최악의 시간들이었거든. 그 시기 교육학 수업을 들으면서 뒤늦게 나는 '대안학교'의 개념을 배웠어. 그래서 내가 바랐던 서머힐은 일반적인 학교 선생님은 아니라는 것도 알았지. 그러다 대학에서 해외 연수를 다녀올 기회를 잡게 되었어. 잠시 한국을 벗어나서 나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선택했던 연수이기도 했어. 짧기는 했지만 잠시나마 모든 것을 지우고 혼자가 되는 시간들이 도움이 되었지. 나는 다시 모든 것을 처음으로 놓고 생각했어. 내가 정말 어떻게 살고 싶은 건지 말이야. 그 시간을 통해 나는 내 가능성을 열었어. 나는 여행도 많이 했고, 많은 사람도 만났어. 교육이 아닌 다른 일을 해보기 위해서 도전했고, 다른 공부에도 몰입했었어. 괜찮은 시간들이었어. 내가 가진 능력을 확인하는 시간이었고, 나를 회복하는 시간이기도 했어. 졸업 무렵 인턴으로 일반 회사에서 잠깐 일을 했지만, 우연한 기회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결국 나는 교육현장이 내 자리라고 생각했어. 그 어떤 일보다 아이들과 있을 때 가장 즐거웠으니까 말이야. 여전히 나는 서머힐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었거든.



스무 살이 넘어도, 대학을 졸업해도 내가 여전히 서머힐 학교를 기억한 이유는 뭘까? 사실 내 원점은 거기였어. 아이를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선생님. 아이의 미래를 같이 고민하고 돕는 사람. 내가 찾은 나의 답은 그거였어. 입시 실패의 상처도 도움이 되었지. 서머힐의 가장 대척점일 수 있는 입시 교육이지만, 한국에선 많은 아이들 입시를 통과해야만 꿈에 닿을 수 있으니까. 기왕이면 과정에서 국어를 문학을 아이들이 더 사랑하게 되면 좋겠고 말이야. 그래서 선생님이 항상 너희에게 말하는 거야 '국어'가 너희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너희에게 '날개'를 달아주길 바란다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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