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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북선생 Mar 01. 2021

진짜 초심

- 새 학기를 응원합니다.

“몰라, 난 그냥 싫어!”

세상에 이렇게 멍청한 소리를 내가 할 줄은 몰랐다. 마주 앉아 있던 ‘장’의 표정이 지금까지도 기억나질 않는다. 얼굴을 바로 보지 않았기도 했지만, 그때 내가 너무 흥분해 있기도 한 탓이었다. ‘장’과 헤어지고 출근해서, 업무를 다 마칠 때까지 나는 흥분해 있었고, ‘장’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떠들어 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온종일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생각을 곱씹으면서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다음에서야 허탈한 웃음이 났다. 그래서 ‘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너 답답했겠다.] 

뜬금없는 내 말에 ‘문’은 무슨 소리인가 되물었고, 나는 바로 답했다. 

[너는 현실주의자잖아. 나보다 더한 사람을 만났어. 네 기분이 딱 이러겠더라고...] 

20년 지기의 폭소는 그날 교훈의 덤이었다.


나는 ‘문’에 비해 이상주의자였고, 과거의 나에게 ‘문’은 비슷하게 화를 낸 적이 있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네가 이 세상을 다 바꿀 거냐고. 최소한 내가 ‘장’에게 한 말보다는 논리적이었던 기억이다. 그렇게 답답해하며 언성을 높이는 ‘문’이 낯설어서 당황했던 기억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는데... 입장이 바뀌고 보니 ‘문’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통감했고, 한편으로 내가 본질에서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난 ‘장’과 점심을 같이하고, 카페에 앉아 잡담이나 나누던 차였다. 대한민국 대다수 사람들의 관심사라고 자부할 수 있는 ‘교육’이 화두였다. 나야 업계 사람이고, 그는 아니었지만, 이쪽으로 진로 변경을 염두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이 고등학교 진학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였기에 자연스럽게 화두는 아이들 진학 상담이 되었다. 사실 나는 하소연을 하고 동의를 얻을 줄 알았다. 학교에서 행해지는 진학지도에 불만이 상당히 많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을 현혹하고 있다고 여겼다. 시기도 적절했다. 고3들이 수시모집을 지원하는 기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내 머릿속엔 온통 입시와 대학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말이다. 내 논리의 연결고리가 그랬다. 그때 내 말은 대략 이랬다.


학업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혹은 부유하지 않은 지역이라는 이유로 학교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특성화(실업계) 고등학교를 추천하는 일이 부당하다. 아이들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너무 무시하는 처사다. 고등학교에 올라가 성적을 부단히 올려서 수시 지원을 잘하는 아이들도 있는데 말이다. 중등교육과정에서 기초를 잘 다져서 고등학교 진학을 올려줄 생각을 해야지,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을 듣기 좋은 말로 꼬여 진학지도를 하면 어쩌자는 건가. 


지난 8년간, 이 업계에서 본 현실이 그랬다. 능력이 충분히 있던 내 애제자가 공고로 진학하려 할 때, 그를 너무도 말리고 싶었다. 그를 적극적으로 공고로 밀어 넣었던 것은 그의 3학년 담임교사였다. 적성에 맞아 보이지도 않았고, 아이의 미래를 틀 안에 가둬 버리는 처사에 분통이 터졌다. 그 아이에게서 사색가의 눈을 봤기 때문에 나는 더 아쉬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아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이는 나를 다시 찾았다.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공고에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취업을 하겠다며 갔던 아이는 결국 3년 뒤 졸업한 고등학교의 학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학과로 대학에 진학했다. 인문계로 진학했다면 그보다 더 좋은 학교로 진학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까웠다. 반면 중학교 때, 엄청 개구진 상태로 만났던 아이는 별생각 없이 인문계로 진학을 했었다. 아니 나를 포함한 주변 어른들의 세뇌와도 가까운 압박으로 택한 길이긴 했다. 고등학교 1학년 성적은 조금 엉망이었고 아이도 힘들어했지만, 조금씩 성적을 올렸고 결과적으로는 입시에 성공했다.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회 분위기가 최소한 전문대학은 졸업을 해야 하는데, 특성화에서 진학을 준비하는 길은 인문계에서 준비하는 길보다 좁고 복잡하고 어려웠다. 더욱이 일부 중학 교사에게 할당량이 떨어진다는 말을 들은 터라 고깝게 보고 있었다. 본인들 인생이 아니라고 아이들에게 너무 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나의 편협한 소견이었다.


“야, 대학 나온다고 다 잘 사냐? 그것도 걔 길이 될 수 있지.”


‘장’이 하는 말이 곱게 들리지가 않았다. 고작 중학교 3학년짜리 아이가 자신의 특기와 적성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 그러느냐고 반박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도 특기 적성 못 찾는 사람도 많고, 진로야 나중에도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는 게 아니냐며 되묻는 ‘장’에게 그러니 선택의 폭이라도 넓은 쪽을 안내해야 하는 것이라 따졌다. 

우리 사회에서 학벌만큼 공고한 계급이 어디에 있는가. 그 계급에 들어갈 기회는 오직 열아홉 그 시절뿐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나는 ‘장’이 그것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여겼다. 그는 이미 괜찮은 학벌을 아니 나보다는 괜찮은 학벌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그 자리에 들어간 방식은 나와는 매우 달랐기 때문에 이미 색안경을 끼고 그를 보고 있었다. 한국의 교육시스템을 뭘 알기는 하는 거야?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나보다 더 강하게 주장했다. 늘 그런 대화를 하며 살았다. 

아이들에게도 늘 비슷한 말을 하며 살았다. 조금만 힘들어도 열심히 하다 보면 성적이 오르고, 성적이 오르면 네가 대학을 선택해서 갈 수 있다. 지금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성적이 너희의 진로를 정하게 될 것이고, 네가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지고 싶다면 성적을 올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이다. 

진로? 그건 성적이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면 어차피 이룰 수 없는 신기루였다. 원하는 대학으로의 입시를 실패하면 기회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내가 그랬다. 고교시절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좋은 쪽에 속했다. 일가 중에 나만큼 성적이 나오는 이가 없어서 부모님은 뿌듯해하셨다.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3년간 성적이 우수했던 학생들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전교 10등 안에도 두 번 들어갔으니, 나는 고교 시절 내가 쏟을 수 있는 역량은 다 쏟았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입시는 실패였다. 목표로 했던 사범대학에서 모두 떨어졌으니 말이다. 난 10살 때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내게 그 꿈은 간절했다.


“갈 길이라면 나중에 어떻게라도 가.”


진짜 이루고 싶은 길이라면 어떻게든 이루게 되는 법이라고 말하는 ‘장’의 말이 원망스럽게까지 들렸다. 나에게 기회는 한 번 뿐이었다. 한 번 실패한 입시는 내가 십 년을 바란 꿈을 보기 좋게 망쳐놓았으니 말이다.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깊고 깊은 상처를 내어 고통스럽게 했는지 모른다. 10년간 목표가 흔들림이 없었는데, 목표 따위 없이 달렸던 동창이 내가 떨어진 학교에 합격한 것을 알았을 때, 늘 나를 견제하던 라이벌이 그의 목표도 아니었던 사범대에 붙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등생 명단에 오른 내 이름에 기뻐하는 부모님과 달리 그 명단 속에 내가 제일 초라한 입시 결과를 얻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건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그런 고통을 나는 아이들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나와 같은 고통을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만큼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했다.


“왜 너의 한을 애들한테 풀어.”


너무 흥분을 했던 나머지 정확한 단어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비슷한 소리를 했었던 것만은 기억한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가 옳은 소리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아이들을 꼬여서 특성화로 등 떠미는 나쁜 선생처럼 나 역시 입시라는 길로 아이들을 억지로 밀어 넣으며, 그 학벌 사회에 끼지 못하면 안 될 것 마냥 겁을 주고 있다고... 대학을 나온다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듯, 대학을 나오지 않는다고 모두가 불행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반박의 여지가 조금도 없는 말을 그가 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의 목표와 꿈이 있다면 언제라도 갈 것이라는 사실도 맞았다. 애제자는 먼 길을 돌았지만 결국 대학은 갔고, 목표한 수준에 미치건 미치지 못하건 간에 그가 꿈꾸던 길에 한걸음 가까워지기는 했다. 정말 그 길이 그의 길이라면 어떻게든 또 뚫고 가겠지. 3년 만에 나를 찾아와 대학에 보내 달라고 할 때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10살 내 꿈은 단순히 선생님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서머힐 학교’에 관한 책을 읽고 그 책에 나오는 선생님처럼 되고 싶었었다. ‘서머힐 학교’는 정규 교육과정을 하고 입시 지도를 하는 학교가 아닌, 대안학교의 시초였고, 그곳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시선을 맞추는 어른이었다. 그래 나는 그런 어른,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본질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학교라는 틀 안에 있고 없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학생 때 만난 아이를 고등학교 졸업까지 최대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도하면서, 아이들의 사랑을 충만하게 느껴왔다. 내가 아이들을 아끼는 것보다 아이들은 나를 더 사랑해주었다. 시선을 온전히 맞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아이들이 미워하는 어른이 아니라는 사실은 안다.

‘장’은 이후 교단에 서기 위해 가시밭길을 택했다. 그의 이상이 현실에 퇴색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날의 일을 그가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주었으니 미안함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의 앞날을 응원하고 싶다. 여전히 나는 입시 강사 일을 하고, 앞으로도 현실에 잡혀 아이들에게 입시를 외치고 다니겠지만, 아이들이 미워하는 어른 미워하는 선생으로는 살지 않을 것이다.



- 8년 차 일 때 쓴 글이며 지금도 종종 다시 읽으며 마음을 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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