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때부터 바둑을 배웠고 빠져 살았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습니다. 다시금 관심을 가졌던 계기는 알파고의 출현이었죠. 바둑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이세돌이 진다고 생각지는 않았을 겁니다. 바둑은 수천 년을 이어온 인류의 보고이자 끝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기 때문이죠. 체스에서 이미 인간이 컴퓨터에게 무릎을 꿇었다고는 해도 바둑은 전혀 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진보해봤자 조악한 컴퓨터가 프로기사를 이긴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대국을 본 소감은 한 마디로 '무섭다'였습니다. 알파고의 한수 한수 면면을 보면 그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신성불가침 영역을 침범받은 느낌이랄까요. 이세돌 9단이 바둑 두면서 그렇게 경악하는 표정을 지을 줄이야. 바둑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기분마저 들지 않았을까요. 결국에는 기적처럼 한 판을 따내기는 했지만 끝끝내 인간이 AI에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바둑인으로서 가졌던 알량한 우월의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구글 같은 기업이 승산 없는 게임을 할 리도 없었으니까요. 어쨌든 바둑은 대놓고 승부를 겨루는 게임이기 때문에 '인간 vs 컴퓨터'라는 자극적인 대결 구도가 성립했고, 성공적인 홍보도 이끌어냈습니다.
이후 바둑계는 대전환을 맞게 됩니다. 인공지능에게 배우는 시대가 열린 것이죠.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추천하는 수를 연구하고, 따라하게 되었습니다. 정석의 개념도 기존과는 많이 달려졌습니다. 인간의 한정적이고 관성적인 수를 확장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이어졌습니다. 한편 알파고는 몇 가지 업그레이드 된 버전을 더 내놓은 뒤, 은퇴합니다. 이제 바둑은 사실상 파훼됐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 되었죠.
이전까지 바둑은 예술의 영역이었습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최선의 수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과정이죠. 바둑은 그 복잡하고 오묘한 특성으로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관련된 격언도 많고,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는 것도 바로 바둑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둑은 흔히 인생에 비견되고, 바둑판은 하나의 소우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멋들어지게 했던 표현들이 이제는 좀 머쓱해졌습니다. 어쩌면 서봉수 9단이 했던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네요. "바둑이란 나무판 위에 돌을 늘어놓는 것이다."
얼마 전 이세돌 9단이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한국기원과의 불화 그리고 AI의 등장이 그 이유이고, 인공지능이 바둑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네요. 제가 이세돌 9단을 주목했던 건 다른 기사와는 다른 행보를 보여왔기 때문입니다. 바둑 역사상 최고의 기사는 오히려 이창호 9단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세돌 9단은 보통의 바둑기사 같지 않은 솔직함과 독보적으로 치열한 기풍을 가진 승부사였죠(이창호 9단이 물이라면 이세돌 9단은 불 쪽에 가깝습니다). 바둑을 공부할 때도 다른 사람의 기보보다는 자신의 바둑을 복기하는 데 집중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런 면이 알파고와의 4국을 이길 수 있었던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바둑계에서 자신이 할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아직 30대 후반임에도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었습니다.
사실 기계가 인간보다 나은 분야는 너무나 많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기계보다 앞선 분야를 찾기 힘들다고 보는 게 맞겠죠. 몰론 인간이 자동차보다 느리거나, 계산기보다 못하다고 해서 폄하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으로 인해 바둑이 없어질 일도 없을 겁니다. 다만 그동안 누려왔던 낭만이 흐려졌다는 게 조금은 섭섭할 따름이죠. 예술은 모호하고 주관적일 때 더 재미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