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든지 시간을 지나고 보면 힘들었던 기억, 욕 나오는 기억, 더러운 기억 등 들이 조금씩 미화가 되어 추억으로 자리 잡는다.
이병 때 느끼던 아침공기는 살벌하고 모든 시선들이 가시처럼 다가왔다면 말년 병장의 아침은 상쾌하고 몸을 순환시켜 주는 깨끗한 공기이며
나를 옭아매는 시선들이나 선임들도 없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서의 군대생활은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혼나지 않기 위해 뛰어다니는 일이병들이 귀엽게 보이고 마치 내가 터줏대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고
모든 군대라이프가 느긋해지고 관대해지기 시작한다.
tv연등을 할 때면 이 생활반 저 생활반을 돌아다니며 이미 말을 튼 후임들과 좀 더 추억을 쌓기 시작하고
아직 군생활이 한참 남은 신병이나 일병들에게는 현실적으로 해줄 수 있는 조언 같은 것도 해준다.
그리고 이 시기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전문하사 권유도 받아봤다.
(절대 할 수 없지)
솔직히 말출을 나갔을 때는 휴가의 기쁨보다는 그냥 덤덤했다.
신분상으론 아직 군인이지만 마음과 정신은 이미 누구보다 민간인이었기에 복귀할 때도 덤덤했다.
복귀 후엔 전방에서의 임무가 다 끝났기 때문에 우리 부대도 다시 예비대로 이사를 한 뒤였다.
그래서 내부는 아직 한창 박스무더기와 정리 중인 짐들이 넘쳐났다.
옛날 같았으면 복귀하자마자 짐 던지고 작업에 참여했겠지만 이젠 아니다.
친한 간부들과 안부를 묻고 반가운 후임들과 운동과 px를 약속을 잡는다.
솔직히 말하면 이때부턴 장소만 군대였지 이미 사회 속에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 개인시간이었기에 운동하고 공부하고 밥 먹고 놀고 이게 다였다.
남는 시간이 많다 보니 오히려 추억회상을 더 자주 했다.
사실 그렇게 오래된 추억들도 아닌데 왜 군대에서의 추억회상은 뭐 그리 짠한지.
어쩌면 모든 남자들의 인생 중에서 가장 순수하면서 열정적이고 남자들 간의 의리와 정을 느낀 순간들은 모두 군대이지 않을까?
전역을 하기 전에 미리 전역증을 받는다.
아무 코팅도 안돼있는 작은 카드만 한 종이에 내 사진과 입대(전역) 날짜 그리고 기수가 적혀있다.
사회에선 아무도 신경 안 쓰지만 군대에선 사소한 모든 게 신경 쓰이듯이
우리 동기들은 깔끔하게 만들기 위해 에이스 후임들을 불러서 칼각으로 코팅을 한다.
여담으로 우리 중대는 휴가 나가기 전에 항상 다우니 세탁법이 또 따로 있었다.
지금 전역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군복에서 다우니 냄새가 난다.
지금은 이 냄새가 나의 추억버튼이기도 하고:)
우리들은 전역하기 전에 마지막 과업이라 부르는 게 있다.
바로 싸인지를 후임들과 간부들에게 써주는 작업인데 보통 가까운 기수들은 정말 정성으로 쓰고
같이 생활을 많이 못한 후임들은 상대적으로 내용이 좀 빈약하긴 하다.
근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드니
쓸게 없어도 최대한 기억을 짜내서 한 줄이라도 더 써주고 싶었다.
이렇게 쓰다 보니 70장 가까이 쓴 거 같다.
그리고 전역 전날 저녁점호가 끝나고 자기 전에 모든 생활반을 돌아다니면서
마지막 인사를 하며 서로가 싸인지를 주고받는다.
그때 주고받는 고생 했어, 조금만 더 고생해라 이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전역 날 아침이 밝았다.
11월 겨울 햇빛이 환하게 모든 창문을 비춰준다.
모두가 밖에서 국군도수체조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 나는 마지막 순간을 최대한 만끽하며 샤워를 하고 군복을 입는다.
그리고 사단 전역식을 하러 가기 전에 아무도 없는 중대 복도와 생활관을 둘러본다.
마치 학교를 졸업하고 텅 빈 교실을 둘러보듯이
신기하게도 내 기억 속의 텅 빈 교실이나 텅 빈 군대는 항상 노을 같은 햇빛이 항상 곁에 있었다.
그리고 그 햇빛이 내 감성을 더 자극시켰다.
사단으로 가기 위한 버스를 타고 도착하니
훈련소에서 만났던 익숙한 얼굴들이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부둥켜안고 서로 축하를 하며 그간 지내왔던 각자의 스토리를 속사포로 풀어냈다.
또 하나 신기한 점이라면 당시 우리가 훈련소에 있을 때 교육단장이셨던 분이 얼마 전 우리 사단장님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더니… 참 재밌는 연이다.
심지어 내 얼굴까지 기억하셔서 속으로 좀 놀랐다.
군대에서 목소리 크기는 계급이 올라갈수록 음소거가 되지만
마지막 사단 전역식에서의 필승은 아마 우리가 이때까지 한 군생활 중에서 제일 컸을 것이다.
다 죽어가는 병장들의 목소리 마저 살려버리는 전역!
“이로써 전역식을 마치겠습니다”
사회자의 이 말을 끝으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기쁜데 마냥 신나지 않았고 씁쓸한데 마냥 씁쓸하지도 않았다.
글로 적기 애매한 이 마음의 감정은 그날 하루동안 나를 많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어떻게 보면 입대하는 순간부터 고대하던 전역인데
뛸 듯이 기쁘지 않고 오히려 마음 한편이 쓸쓸했다.
군대와 정이 너무 많이 들어버린 것일까?
어쩌면 사람 간의 이것저것 재지 않고 남자로서 의리와 내 식구라는 이름 하에 서로를 챙겨주는 모습들이
앞으로 다시 경험하기 힘들 거 같아서일까?
나도 이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겠다.
그냥 좀 긴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랄까..
군필자들만이 어쩌면 이 기분과 몽글몽글한 감정을 알겠지.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난 그곳에서 유일한 감정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