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사랑한다 =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간다
최근 이직한 회사 인터뷰에서 담당자가 내게 했던 질문이 이직 후 3개월 차에 접어든 요즘에 자꾸만 생각이 난다.
그 질문은 ‘고첼씨 사람 참 좋아하죠?’ 였다.
내 대답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YES 였다. 언제나 들어왔던 질문이고 나는 사람을 참 좋아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사람을 좋아하는 내 성격을 좋아했다. 그래서 ‘사람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인정 받는 것 같아서 기분마저 좋았다.
그런데 요새 나는 이 회사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사람 좋아하던 내가,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의 내 모습과는 전혀 상반된 태도로 일관한다.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경우도 별로 없고, 대화도 거의 나누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재미 없는 개그에 억지로 웃지도 않고, 회식 자리에서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그 질문을 한 담당자를 볼 때마다 그가 내게 했던 질문이 요즘 들어서 자주 생각난다.
‘내가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나...?’
그런데 적당히 싸가지가 없어진 후로 생활이 참 편해 지고 여유 시간도 많아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참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을 너무 의식하면서 살아왔다.
회식을 할 때, 끝까지 있기 싫어도 내가 먼저 집에 가면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줄까 하는 걱정에 끝까지 남아서 자리를 지켰다. 그것도 모자라서 공식적인 회식이 끝난 후, 주당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마지막 술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도 빠지면 괜히 마지막에 분위기 망치는 것 같아서 동참했다가 술에 떡이 되기 일쑤였다.
누군가 어떤 부탁을 할 때는 세~상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면서 제가 도와드리겠다며 일을 받아서 하다가 시간이 좀 지나서 생각해 보니 왠지 모를 괘씸함에 억울해서 화병이 난다거나, 피곤해 죽을 것 같은 날에도 친구나 지인이 술 한잔하게 나오라고 하면, 피곤해서 쉬겠다고, 거절하고 싶어도 왠지 거절 당할 상대방에게 미안해서 무릎까지 내려온 다크써클을 주워담고 터벅터벅 약속장소로 기어가는 등.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배려한다는 명목 하에 손해 보는 일을 자처하는 행동을 수 없이 했었다.
퇴근 후 홀로 집에 돌아가는 길은 항상 외로웠고 주말엔 어떻게든 약속을 잡아서 좋은 술과 음식을 먹어야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헤어지는 것이 늘 아쉬워서 항상 이 밤이 새 도록 얼큰하게 술을 마셔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항상 공허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야기만 들으면 누군가는 내 성격이, 쑥맥에 말도 없고, 목소리도 작고, 찌질해서 자기 주장도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내가 앞서 나열한 이미지들을 반대로 뒤집으면 딱 내 이미지였다. 완전 외향적인 성격에, 항상 목소리 크고 말 많고, 자기 주장이 강해서 내 주장이 틀렸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사람에게는 목에 핏대를 세워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입증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뭐냐고? ㅋㅋㅋㅋㅋ 또라이네. 앞뒤가 너무 다르 자나, 라는 생각이 바로 들 것이다. 인정한다. 내가 저랬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공식적인 회식 자리 이후에 나 보고 남으라고 사정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괜히 혼자 분위기 띄워야 할 것 같아서 술 돌리고 먼저 가는 사람 왠지 정 없게 느껴져서 서운해 했다.
내 일도 아닌데 떠넘겨 받은 일이나 부탁에 대한 것도 그 자리에서 힘들다고 말하면 되고, 그게 부당한 것도 다 알면서 앞에서는 거절 못하고 세상 좋은 사람인척 연기 해 놓고 뒤에 가서 혼자 끙끙 앓는 것도 내 잘못이었다. 만약에 내가 정중히 거절 했다고 하더라도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 다는 것을, 내 동기가 같은 상황에 정중히 거절을 하면서도 ‘똑부러진다’는 수식어를 수여 받았을 때 알게 됐다.
내가 피곤해 죽겠는데도 친구의 술자리 제안에 나갔던 것은 내 친구가 나에게 거절 받았을 때의 서운함도 있었지만, 나중에 내가 술 먹자고 제안할 때 거절하지 말라는 일종의 협상에 가까웠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온전히 내가 착하 거나, 타인에 대한 희생정신을 나의 행복으로 삼는 이타심 만렙의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나는 손해를 보기 싫어하는 성격의 사람에 가깝다. 무시 받는 것을 싫어하고, 배려를 할 때의 뿌듯함 보다는 배려를 받을 때의 우쭐함이 좋았다.
그럼 도대체 왜 이렇게 상반된 내면과 외면을 보였던 것일까?
나는 착하지도 않은 주제에 왜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것일까? 나는 이제 그 정답을 안다.
바로
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다. 그 결과, 자존감이 낮았던 것이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아서 자존감이 낮다….. 그렇다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누구에게나 보편 타당한 정의를 감히 내가 내릴 수는 없겠지만, 지난 6개월 동안 묻고 또 물어서 찾아낸
‘자신을 사랑하다’의 나만의 정의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 했다.
아마 대한민국 사회적 특성상 내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일 것 같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라고 강조하며, 사회성이 좋아야 한다고 강요 받았다.
다시!
난 내가 누군지 잘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알아야 (사랑해야) 하고 배려(이해) 해야 하며, 심지어 조직까지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성이 좋다는 소리를 듣는다.
말이냐 방구냐.
4칙 연산도 모르는 수학선생님이 인공지능 개발 강의하는 소리 아니겠는가? 그러니 사회성이 결여 된 인간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내 진정한 자아와는 별개로, 사회가 원하는 행동을 억지로 짜낸 뒤에 이유 모를 스트레스를 느끼며 화병이 돋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내 원래 성격이 그런 줄 착각했었다.
쉬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일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 기간에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 옆에서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방법을 지금도 배우고 있다. 그렇게 물 흘러가 듯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어느 새 나는 적당히 ‘싸가지’가 없어져 있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아낄 줄 알면서 (자아를 이해하면서)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됐다. (타인을 이해하게 됐다) 나를 상처 주는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게 됐고, 나의 어떤 말과 행동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었는지 이해하게 됐다. 그랬더니, 자연스럽게 말 수가 줄어들었다. 대화가 준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말이 줄어들었다는 말이다.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가정이 전제가 됐기 때문에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목소리 크기도 줄어들었다. 자존감이 향상 되니 굳이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아도 내 말에 귀 기울일 사람들은 다 듣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들어주기 부담되는 부탁은 정중하게 거절을 한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부탁도 잘 안하게 됐다. 퇴근 후와 주말에는 굳이 친구들을 찾지 않더라도 외롭지 않고 나를 위해서 보내는 시간에 행복과 감사함을 느끼게 됐다.
적당히 싸가지가 없는 사람들이 사회생활이 편하다는 말은 어쩌면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들 적당히 싸가지가 없었으면 좋겠다.
착하지도 않으면서 착한척 자신을 속이느라 불쌍한 자신의 영혼을 학대하지 마시고, 자신을 아끼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합시다. 서로가 적당히 싸가지 없어지면 언젠가 ‘싸가지 없다’ 라는 말의 속 뜻은 ‘저놈은 스스로를 아끼는 놈이군’ 과 동의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발칙한 상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