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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첼 Oct 23. 2018

결혼을 해야 할까?

결혼을 결심했다.


두 사람이 만나 일평생 반려자가 되기로 하는 약속. 반드시 해야 할까?


내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혼은 해야 한다. 아니, 적어도 나는 해야 하는 사람이며, 결혼이란 시스템에서 여생을 마무리 하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결혼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거나 반드시 일부일처가 아닌 다른 형태의 결혼이 가능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살면서 그 어떤 노력도 없이 얻는 보물 한 가지가 있다.


부모님의 절대적인 사랑.


생각해 보면 우리는 태생 자체가 기생이다. 엄마의 영양분을 탯줄로 쪽쪽 빨아먹고, 분만 과정을 통해서 자식은 어미에게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선사하며 첫 인사를 한다. 고약한 첫 만남일진데도, 어미는 자신의 젖을 물리는 것으로 화답한다. 세상 가장 큰 환희와 함께.


신은 인간의 아기에게 엄청난 재능을 부여했는데, 그것은 부모를 괴롭히는 능력이다. 그 방면에선 인간의 아이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부모의 등골을 뽑는다.


호모사피엔스의 영아는 할 줄 아는 거라곤 먹고 싸고 자고 우는 것 밖에 없는 미물일 지라도 자신의 부모를 못 살게 구는 방면에서는 어찌나 영특한지, 이마저도 부모가 좀 적응했다 싶으면, 주기적으로 병이 나는 방법으로 부모들의 혼을 갉아 먹는다.


그럼에도, 부모에게 아이의 뒤집기는 프로레슬링이요, 걸음마라도 할까 하면 우사인 볼트, 옹아리를 시작하면 유재석이다. 개똥만큼의 가치도 없는 아기의 개인기에 열과 성을 다해 칭찬해주는 건 부모님 밖에 없다.


부모를 괴롭히는 인간의 재능은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 치타나 말의 달리는 능력만큼이나 인간은

그 어떤 포유류보다 이 방면에서는 타고났다.


이 능력의 진가는 청소년기에 더욱 크게 발휘 된다. 파렴치하게도 청소년기의 인간은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범 지구적인 표어까지 만들어서 부모를 괴롭히는데 정당하게 면죄부 행사한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서 성인이 되어도 대부분의 호모사피엔스는 부모를 괴롭히던 버릇을 쉽게 버리지 못하거나 버리지 않는다.


사회에서 가성비가 개똥과 동급 연비를 자랑하는 이런 나지만, 이세상에서 맹목적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이는 부모님 밖에 없다.


결혼 전까지는 말이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부모님이 내게 주었던 사랑의 크기 이상으로 반려자를 사랑하겠다는 의미다. 적어도 나는 결혼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다. 인간이란 게 사랑을 받기만 했지 줘 본적이 별로 없어서 그 과정이 너무도 고통스럽다.

 

결혼이 힘든 이유가 바로 부모님을 괴롭히는 인간의 천부적인 재능을 비로소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에게 준 몇 안 되는 그 천부적인 재능을 말이다.


결혼을 하면서부터는 입장이 바뀐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온갖 악랄한 방법으로 상대방을 괴롭히던 악마에서, 이타적인 사랑과 배려 인내심으로 무장한 '천사'의 위치가 된다. 아니, 되어야만 한다.


모양이 다른 쇳덩이 두 개가 만나 평생을 부딪히고 깨져가며 하나의 보석이 되는 과정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 과정이 얼마나 열불이 나고 뒤틀릴지 상상을 해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혼을 해야 한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결혼을 해야 한다.


No Pain, No Gain이라 했던가. 힘든 과정 없이 얻어지는 가치는 이 세상에 결코 없다. 결혼 이후 평생을 걸쳐 내 반쪽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인내하고 사랑해야 한다. 자신의 몸이 녹아 내리고 깎여 나가는 고통을 견뎌 내어 내 반쪽과 자웅동체의 모습으로 성형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목숨을 거는 각오로 결혼식장에 입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남은 인생 전부를 걸어 서로 다른 둘이 하나가 되는 과정인 것이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그만큼이나 큰 사랑을 주시던 두 분은 세상의 순리대로 나보다 먼저 우주로 돌아간다. 우주의 미아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결혼이다. 부모님이 세상에 없는 그날, 서로가 서로의 부모가 되어주는 과정이다. 결혼은.  


인생의 마지막 여정에 와있다고 상상해 보자. 의미 있는 인생이었다며 토닥여 줄 수 있는 또 다른 자신과 또 다른 부모님이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같은 곳을 바라 본다.


그러니 결혼은 그 엄청난 고통을 감내할 충분히 가치 있는 선택이지 않을까. 그러니 결혼을 해야 하지 않겠나.


결혼을 결심했다. 아니 결혼을 각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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