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 폭풍전야 같은 차가운 적막이 감돌았다. 찬영은 조수석을 힐끔거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작가들 또한 뒷좌석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형순 피디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반면 형순은 한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때 선영 작가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네, 대표님. 아… 네, 그러시구나."
통화를 하며 선영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면 혹시 저희가 채준 님이랑 한 번만 더 얘기를 해볼 수… 여보세요?"
말도 끝나기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잠시 망설이던 선영이 앞자리로 몸을 숙여 형순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 피디님. 마케팅 회사 대표님이신데요."
"뭐라셔요?"
"채준 씨 쪽에서 저희 방송 출연하는 거 취소하시겠다고…."
선영 작가의 말을 듣고도 형순은 대답이 없었다. 선영은 도로 뒷좌석에 몸을 기대며 수진 작가와 우려 섞인 시선을 주고받았다. 찬영도 초조하게 분위기를 가늠하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형순이 불쑥 입을 열었다.
"찬영아."
"네, 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
역시나 뻔하게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찬영은 갈라진 목 사이로 힘겹게 침을 삼켰다.
"거짓말하는 사람이요."
"그래, 알지? 나 일 못하는 것보다 거짓부렁 하고 변명하고 그러는 거 더 싫어하잖아."
이어질 질문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찬영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어제 술 마셨니?"
찬영은 얼어붙었다. 하지만 침묵이 길어지면 자백으로 여겨질 게 뻔했다.
"아니요! 안 마셨습니다."
역효과였다. 형순은 이성을 잃고 찬영의 멱살을 쥐었다. 아침부터 참아오던 분노가 폭발한 듯했다.
"마셨잖아, 이 새끼야! 이 #%$@! 네가 &(!#%?"
형순은 육두문자를 쏟아내며 찬영의 목깃을 거칠게 잡아 흔들었다. 하늘색 레이가 위태롭게 중앙선을 넘나들며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흔들렸다.
"피디님! 저 지금 운전 중…"
"위험해요, 피디님! 사고 나요!"
수진 작가가 다급하게 형순을 말렸지만 그는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다.
"솔직히 말 안 해, 이 새끼야!"
"진짜 안 마셨다니까요!"
파일철이 책상 위를 거세게 내리쳤다. 황 팀장이 고래고래 퍼붓는 소리가 뒤따랐다.
"그럼 왜 늦었는데, 왜! 왜!"
형순네 팀원들은 유구무언이란 표정으로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황 팀장의 호통에 사무실을 공유하는 타 팀 직원들도 덩달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중 옆 팀 막내 작가인 세라만이 유독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관망하고 있었다.
"야, 박형순! 네가 설명을 해봐, 인마!"
"팀장님, 저는 전날 새벽까지 연락해서 확인을 했거든요. 중요한 촬영이니까 일찍 들어가서 자라고…."
형순은 어떻게든 책임을 모면하려 장황하게 말을 늘어놨다. 찬영은 그저 입을 다물고 듣고 있을 뿐이었다. 딱히 변명거리가 없었다. 새벽까지 술을 퍼마시고 늦잠을 잤다고 고백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핑계를 대려면 참작이 될 만한 그럴듯한 내용을 생각해내야 했다.
"야!"
형순이 찬영을 향해 소리쳤다.
"네!"
"네가 말해 봐! 왜 늦었는지. 술 마신 거 아니라며?"
"아, 그게…."
모두의 시선이 찬영에게로 쏠렸다.
"너 밤에 내가 전화했을 때 뭐 하고 있었어? 그때 어디 있었냐고!"
찬영의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뭐라도, 아무 거나 좋으니 생각해 내야 한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수진 작가가 머뭇대며 끼어들었다.
"저기…"
"뭐?"
황 팀장이 버럭 소리치자 수진이 찬영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피나시는 거 같은데…."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찬영의 목덜미를 향했다. 뒤통수 상처에서 스며 나온 검붉은 자국이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아침부터 조금씩 흘러내린 피였다. 형순은 놀라며 물었다.
"뭐야, 너 다쳤어?"
"아, 네. 그게…"
그 순간 아이디어 하나가 번뜩였다. 어젯밤 해장국집 TV에서 봤던 영화 속 퍽치기 장면이었다.
"저, 아무래도 어젯밤에 퍽치기당한 것 같아요."
그 말에 팀장을 포함한 사무실 전원이 화들짝 놀라 찬영을 바라봤다.
"뭐? 퍽치기?"
되묻는 형순의 말에 옆 팀 세라 또한 귀를 쫑긋하며 찬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아마도."
"진짜야? 요즘 세상에 퍽치기라니? 어떻게 된 건데?"
"그게 자세한 기억은 없긴 한데…."
찬영은 힘겹게 기억을 쥐어 짜내는 모습을 연기했다.
"어제 야근 끝나고 집에 가고 있었던 기억은 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길에 누워있더라고요. 머리에선 피도 나고."
"그냥 넘어진 거 아냐? 뭐 도둑맞은 거라도 있어?"
형순 피디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아, 그… 지갑이랑 물건도 좀 없어지고…."
"그 상태로 아침에 운전까지 해서 다녀왔단 말이야?"
황 팀장은 짐짓 과장스러운 태도로 걱정스레 다그쳤다. 업무 성과를 따질 타이밍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한 듯했다. 상사로서 소홀한 태도를 보였다간 골치 아픈 일들이 뒤따를 수 있었다. 괜히 형순만 무안해진 상황이었다.
"아니, 그럼 말을 하지. 병원부터 가지 그랬어."
"오늘 인터뷰가 너무 중요한 일이라. 어떻게든 끝내고 가려했습니다."
찬영은 최대한 불쌍한 어투와 표정으로 말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아무도 그에게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야, 박 피디. 넌 조연출 다친 것도 모르고 뭐 하는 거야? 아무리 일도 중요하지만, 피까지 흘리는 애를 몇 시간씩 운전시키고. 시청률에 눈멀어서 사람 잡을 일 있어?"
"아니, 그게 저도 피나는 걸 못 봐서요."
결국 화살이 형순에게로 향하자 형순은 억울한 말투로 대답했다.
"경찰에 신고는 했고?"
황 팀장이 찬영에게 사뭇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아니요, 아직 못 했습니다."
"일찍 들어가 봐. 치료부터 받고 바로 경찰서 가. 빨리 신고해야 범인 잡지. 박형순, 넌 시말서 써서 내."
팀원들은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찬영은 가능한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장비실 앞에서 홀로 촬영 장비를 정리했다. 잠시 후 선영 작가가 다가왔다.
"찬영 씨, 괜찮아? 난 다친 줄도 모르고."
"아, 괜찮아요."
"아니, 진짜 세상 무섭다. 퍽치기가 뭐야, 퍽치기가. 불안해서 길거리 돌아다니겠어?"
"그러게요. 진짜 무섭네요."
양심에 찔린 찬영이 겨우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 모습에 선영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완전 살인미수 급 범죄잖아! 꼭 무슨 남 얘기처럼 하네, 자기는."
찬영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뒤에서 침묵을 뚫고 형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 야. 그런 줄도 모르고. 장비 놔두고 빨리 들어가."
형순이 찬영의 어깨를 다독였다. 찬영은 몸 둘 바를 알 수 없었다. 상황을 모면하려 둘러댄 거짓말을 모두가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한시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다. 그는 정리한 장비들을 서둘러 장비실에 수납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찬영은 쭈뼛대며 인사하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세라 작가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