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니다. 너무 깁니다. 좀 짧게 안 될까요.
저는 벨기에 학술도서관의 사서입니다. 지난주 우리 도서관의 신년행사를 했습니다. 함께 보실래요?
저는 공무원입니다. 그 말인즉슨 신년회 같은 거 할 때 휘황찬란하게 못 한단 뜻입니다. 간소하고 검소한 신년회이죠. 김영란법은 없어도 나랏돈으로 신년회를 하는데 흥청망청 쓸 수는 없으니까요. 벨기에에서도 사기업에서는 멋들어진 레스토랑에서 하고 그럽니다. 저희는 제가 근무하고 있는 대학의 작은 홀에서 케이터링을 불러 신년회를 하고, 스탠딩으로 이루어집니다. 빨리 먹고 빨리 가라는 얘기죠.
오후 5시에 시작이고 하루종일 공짜 밥 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 할 때 집중도 되지 않고요.
그런데 전 세계를 아우르는 법칙! 밥 먹기 전의 높으신 분의 스피치, 신년사를 먼저 치러야 하지요.
저기 저 양복 입으신 분이 우리 도서관의 관장님이십니다. 역사학 박사님이고, 스피치를 좋아하시며 한번 시작하면 언제 끝날 지 모릅니다.
관장님의 신년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높으신 분은 동료들의 경조사: 출산, 부고, 은퇴 기타 등등과 미국의 대선(여기가 미국입니까? 예?)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세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주말아침에 하던 MBC 지구촌 리포트인가요? 동료들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제 의식도 점점 멀어집니다. 슬쩍 샴페인 한잔을 집어 들고 관장님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샴페인을 마십니다. 한잔을 다 마셨는데도 아직 신년사를 마치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동료들은 음식을 자꾸 힐끔거립니다. 솔직히 배가 너무 고파 무슨 말하는지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그냥 밥 먹고 싶다고요!
저는 관장님으로부터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명상을 합니다.
아직도 안 끝났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티 안 나게 다시 Bar에 살금살금 가서 샴페인을 한잔 더 가져옵니다. 또다시 최대한 멀리 가서 서 봅니다.
샴페인을 한잔하고도 반을 더 마셨을 때야 신년사가 끝납니다. 동료들 얼굴이 별로 안 좋습니다.
뷔페에 줄을 서고 나서야 표정이 점점 밝아집니다.
저희 도서관은 아주 큰 도서관이어서 동료들도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잘 보지 못하는 동료들도 많습니다. 그들과 얘기를 나누었냐고요? 제가 E 외향형이긴 해도 잘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건 또 불편한지라, 저랑 친하고 자주 보는 동료들 옆으로 갑니다. 그래야 하하 호호 웃고 떠들고 재미있죠.
뷔페코너에 줄이 너무 깁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되었을 때,
"저 두 번 안 올 테니까 2번에 가져갈 만큼의 양을 주세요."라고 당당히 이야기합니다.
동료들은 탑처럼 쌓아 온 제 접시를 보고 웃겨서 뒤집어집니다. 떨어질 듯 말 듯, 위태위태합니다.
아니 왜, 뷔페는 다 이런 거 아닙니까?
다시 안 온다고 해 놓고 한번 더 갔지만 음식 남기면 못 씁니다! 저는 지구의 생태계와 환경을 생각한 것뿐입니다.
스탠딩으로 하면 당연히 길게 못 있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피곤합니다. 다들 7시 30분쯤 되어 집에 갑니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요? 벨기에는 회식이 많지 않습니다. 끽해야 일 년에 두 번, 세 번입니다. 친한 동료끼리 개인적으로 식사약속을 하긴 하지만 직장에서 주관하는 식사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일찍 끝난 게 아쉽군요. 게다가 두 시간 반 정도 되는 신년회에서 엄청 길었던 신년사는 더욱더 아쉽고요.
관장님이 한국어를 못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관장님, 어차피 못 읽으실 거지만 다음번 스피치는 좀 짧게 부탁드려요.
이상, 벨기에의 광기 발랄 사서 고추장와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