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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로 가는 도로 위의 10시간

꽉 막힌 차들, 입 댓 발 나온 베짱이와 긴급상황

by 고추장와플

호텔 옆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러 어제 첫째와 둘째가 소비한 만큼 먹을거리를 다시 꽉꽉 채웠다. 특히나 도로이동 시, 휴게소에서 하는 식사는 가격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싸고, 낸 돈이 아까워 억지로 먹는 맛이니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서 먹으면 돈도 아끼고 소중한 내 혀도 보호할 수 있다. 독일까지 왔으니 빵과 케첩, 머스터드소스, 그리고 소세지와 과일을 사서 휴게소에서 핫도그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혹시라도 서유럽으로 휴가를 계획하시는 분들은 주목하시라!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과 같은 나라의 대 도시에 가실 계획을 세우신다면, 라면과 김치는 집에 두고 오시는 것이 낫다. 체감상 요즘 대도시의 슈퍼에는 불닭볶음면, 신라면 등의 라면과 여러 가지 한국음식이 슈퍼에서 판매되고 있으니 그냥 유럽에 오셔서 사도 된다. (!주의: 크로아티아나 동유럽 국가들은 한국음식을 일반 슈퍼에서 찾기 쉽지 않다. ) 독일 뉴렌베르크의 한 슈퍼마켓에서 한국음식들을 보니 참 반가웠고, 한국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다는 것을 느꼈다. 한인마트나 아시아 상점이 아닌 현지인들이 가는 슈퍼마켓이었다.

뉴렌베르크의 일반슈퍼에서 만난 북촌떡볶이, 홍대떡볶이, 고추장 등등
안 먹고 싶게 생긴 떡인지 밥인지 모를 일본식 포케볼과 비비고김치

하지만 이미 차 트렁크에 고추장, 간장, 라면까지 이미 다 챙긴 나는 간단하게 먹을 것과 아이들 간식만 사서 출발했다. 갈 길이 아주 멀다.


독일까지는 베짱이가 운전을 했고, 이제 오스트리아로 진입했다. 국경을 넘을 때마다 의심되는 차를 검사하기 때문에 국경부근에서부터 차가 많이 막혔다. 특히나 비녜트 <Vignet> 검사를 동시에 진행하는데, 비녜트는 해당국가의 통행허가서이다. 유럽의 몇몇 국가들은 비녜트를 구매해야 고속도로를 통과할 수 있다. 온라인 또는, 인접국가에서 입국하기 전 주유소에서 구매가 가능하다. 구매하지 않아도 물리적인 통과는 가능하지만 도로 곳곳에 카메라가 감시하고 있으니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청 난 금액의 벌금고지서를 받기 싫으면 이동국가의 고속도로 이용시스템을 잘 알아보고 미리 비녜트를 구매해야 한다. 내 차가 아니고 렌터카니까 상관없을 것 같다 하지만 오산이다. 사용자 이름으로 등록되어 해당기간 벌금이 나오면 지구 끝까지 따라가서 받아낼 기세니, 잊지 말고 비녜트를 구매하자. 우리는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 두 구간의 비녜트를 구매했다.


2025년 기준 Vignette 이용 국가

중앙유럽 및 동유럽 중심

오스트리아 (Austria) – 고속도로, 일부 국도
스위스 (Switzerland) – 고속도로 전 구간 (연간 비녜트만 있음)
체코 (Czech Republic) – 고속도로 전 구간 (현재는 전자 비녜트로 전환)
슬로바키아 (Slovakia) – 고속도로 전 구간 (전자 비녜트)
슬로베니아 (Slovenia) – 고속도로 전 구간
헝가리 (Hungary) – 고속도로 전 구간 (전자 비녜트)
루마니아 (Romania) – 국도 및 고속도로 (전자 비녜트)
불가리아 (Bulgaria) – 모든 주요 도로 (전자 비녜트)
몰도바 (Moldova) – 모든 도로 (전자 비녜트)
물리적인 비녜트는 이렇게 차에 부착할 수 있게 되어있지만 요즘엔 온라인이 대세다.


오스트리아의 국민 음료수 알름두들러 Almdudler


오스트리아 구간은 교대하여 내가 운전을 했고 드디어 슬로베니아에 진입했다. 아직까지 아이들도 넷플릭스를 잘 보고 있고, 교통체증도 없다. 슬로베니아 운전은 다시 베짱이 차례다. 슬로베니아는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 청정하고 깨끗한 이미지의 도시였다. 파올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의 배경이 된 류블랴나가 있는 나라이자 미국의 백악관에 기거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의 고향이다. 잠깐 들른 휴게소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묘하게 멜라니아 트럼프 분위기가 났다. 큰 키에 밝은 머리색을 가지고 있지만 독일인이나 오스트리아의 느낌과는 살짝 다른 슬라브계통의 느낌이랄까? 슬로베니아도 휴가 때 유럽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아름다운 블레드 호수와, 보빈 호수, 세계에서 가장 큰 동굴이며 동굴열차로 유명한 포스토이나 동굴이 있는 곳이라 하루정도 들렀다 갈까도 생각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숙소비가 생각보다 비쌌기 때문이다. 언젠가 살면서 다시 올 날이 있을 테니, 다음을 기약하고 오늘은 운전에만 집중하자!

슬로베니아, 여기서부터는 배우기 극악이라는 슬라브어가 시작되는데 뭔 말인지 모르겠다
청정하고 깨끗한 느낌의 슬로베니아
끝이 안 나오는 길고 긴 터널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슬로베니아는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헝가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로 위에서 언급된 국가를 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도로 곳곳 차가 엄청나게 막혔다. 원래대로라면 슬로베니아를 통과하고 세 시간 정도면 우리의 목적지까지 도착해야 하지만, 도로공사와 밀리는 차로 인해 차들은 거북이처럼 가다 섰다를 반복했다. 구글맵의 도착시간은 줄어들 생각도 않고 오히려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베짱이가 운전대를 잡은 지, 벌써 네 시간 반이나 되었다. 점점 입이 앞으로 나오다 이제는 입이 댓 발 나왔다. 나도 교대해 주고 싶지만, 휴게소가 나와야 교대를 할 것이 아닌가.


차들이 꽉 막혀있는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넷플릭스를 보던 둘째가 소리친다.


엄마, 쉬야! 쉬야해야 해!!!

응? 조금 참을 수 있어??

아니, 못 참아. 나 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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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놔, 미취겠다. 고속도로에 갓길도 없고 차는 꽉 막혔고 진퇴양난이다. 비상사태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가운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다 마신 물통... 아들이라 다행이다...

그런데 보조석에 앉아 있던 나에게 아들이 있는 곳까지 팔이 닿지 않는다. 둘째는 아직 어리기도 하고 소근육 발달이 잘 되지 않아 물통입구 조준이 잘 안 된다. 첫째를 급히 소환한다.


첫째야, 엄마가 믿을 건 너밖에 없다. 엄마 손이 안 닿는데 네가 둘째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아 왜! 아~ 싫은데!

첫째야, 부탁이다. 엄마도 할 수 있으면 하겠는데 손이 안 닿아!


알았어라며 물통을 제대로 잘 조준한 첫째, 그리고 자기 할 일을 하기 시작한 둘째. 그런데 갑자기 첫째가 소리를 지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왜, 무슨 일이야. 흘렸어? 왜, 왜?


엄마, 플라스틱이 너무 얇아서 따듯한 게 다 느껴지잖아. 으아아악 내 손에 쉬야하는 느낌이라고오오오!


웃으면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너무 웃겨서 웃음이 났다. 웃는 나를 보며 첫째는 눈을 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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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이렇게 형에게 평생 갚아야 할 빚이 생겼다. 첫째의 엄청난 희생으로 긴급상황을 잘 해결한 우리는 계속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표지판에 우리가 가는 이스트리아 지역의 지명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드디어 크로아티아 국경에 도달했다. 다섯 시간을 내리 운전한 베짱이의 입은 댓 발이 아니라 백 발 나왔고 점점 말이 없어졌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줘도 음료수를 건네줘도 시큰둥이다. 교통체증이 없어졌을 때는 이미 30분 정도만 운전하면 되는 상황이었기에 끝까지 운전하겠다 한다. 이제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운전한 지, 거의 10시간이 되었다. 구글맵이 보여준 시간 그대로 믿은 우리의 잘못이다. 구글맵이 보여주는 도착시간은 검색한 그 시각의 예상시간이다.


드디어 이스트리아라고 쓰인 간판을 보니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ISTRIA 간판과 간판 너머로 보이는 바다.

왁!,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 포레치 <Porec> 출구로 나간다. 숙소의 주인아저씨에게 계속해서 더 늦는다는 문자를 네 번이나 보내고 우리는 드디어 해냈다. 그렇게 10시간 만에 숙소에 도착했다.

크로아티아어와 이탈리아어 공동표기된 우리의 목적지 Porec/ Parenzo


10시간을 운전하고 숙소에 도착해서도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차 안의 짐을 3층 아파트에 올려놓아야 한다. 아.... 엘리베이터가 없다. 하아.... 짐은 또 왜 이렇게 많이 싸 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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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도 짐 몇 개씩 맡아 우리가 묵을 숙소에 내려놓는다. 드디어 한숨 돌리고 테라스에 나가 밖을 바라봤다. 멀리 저 어딘가는 바다일 텐데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래도 별이 초롱초롱하다.


수고했다, 베짱이! 내일은 재미있게 놀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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