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만 검으면 다 브루스 리?

라시드 이야기 7

by 고추장와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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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을 친 아파트에서의 새로운 하루가 밝았다.

라시드가 달아준 커튼

우리집 안이 들여다 보일까 신경 쓰지 않고, 일어나 아침상을 차린다. 라시드 덕분이다.


아이들 도시락을 챙기기 위해 쪽방에 있는 가방을 가지러 들어간다. 붙여놓은 노란 테이프가 떨어져 한겨울인데 창문이 반쯤 열려있다. 언제부터 열려 있었는지 방에서 입김이 나온다. 이것도 라시드 덕분이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라시드는.


건물주왕국의 왕자인 집주인 아들 토마스의 어머니가 열쇠를 찾지 못해 우리는 마스터키를 다른 집에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는 약속을 하고 받게 되었다. 세입자가 건물 전체에 들어갈 수 있는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지만 이 건물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 수시로 일어나니 그러려니 한다.


세입자에게 마스터키를 주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토마스는 열쇠공을 불렀다. 곧 열쇠를 만드는 사람들이 다녀갔고, 그렇게 우리는 마스터키를 다시 토마스에게 돌려줬다. 보편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신신당부한 대로 남의 아파트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다. 세상에 믿을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들과 바깥에 나갔다 들어오는 길, 아파트 앞에서 라시드를 마주쳤다.


"하! 친구, 여기서 이렇게 만나니 반갑네요. 오늘 날씨가 참 꾸리꾸리 하네요. 그래도 여기서 오래 살아서 익숙해졌어요. 난 모로코 사람이지만, 여기서 28년이나 살았거든요. 햇빛 좀 안 난다고 죽진 않더라고요."


"전 17년 살았는데 라시드처럼 덤덤해지려면 아직 11년을 더 살아야겠네요."


라시드가 첫째를 보더니, 반갑게 하이파이브를 하려 손을 올리며 말했다.


"여기 있었구먼, 브루스 리(Bruce Lee)!"


오늘은 그냥 넘어가나 했는데 첫째에게 브루스 리 라니. 첫째는 얼굴을 찡그리며 내 얼굴을 바라본다. 브루스 리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길 가다가 모르는 사람이 첫째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참지 않았겠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군가. 라시드가 아닌가. 우리에게 커튼도 주고 추위도 준 라시드 말이다. 그는 항상 악의는 없다. 다만 특이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다. 악의가 없는 것을 알고 있으니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매번 병을 주면 약도 주는 라시드가 이번엔 또 어떤 약을 줄 지 궁금해 지기까지 했다.


라시드가 씨익 웃더니 말했다.


"너네 게임할래? 1층에 토마스가 수집하는 게임기가 있어. 핀볼게임기인데 엄청 재밌다? 해 보고 싶니? 하지만 토마스에게는 절대 말하면 안 돼. 아끼는 게임기를 내가 사용한 걸 알면 안 좋아할 거야."

토마스가 수집하는 핀볼게임기들

그의 열쇠로 토마스의 보물창고 문을 따 주었고 아이들은 오락실에서나 보던 핀볼게임기가 8대나 있는 것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실로 어마어마했다. 역시 토마스는 건물주왕국의 왕자라 취미도 고급스럽다. 종류도 다양했고 난이도도 다 달랐다.


이렇게 서로 공유하는 비밀이 생긴 아이들과 라시드는 종종 함께 핀볼게임을 했다. 물론 토마스는 아직 모른다. 아이들은 토마스에게서도 핀볼게임 초대를 받았고 라시드에게도 토마스 몰래 초대를 받았으니 이것을 전문용어로는 '개꿀'이라 한다.


머리가 검은 동양 남자면 다 브루스 리로 만들어 버리는 라시드는 역시 오늘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인종차별이라기보다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것과는 다른 길을 가는 라시드식 친근함의 표현이라 해 두자. 오늘도 병 주고 약 주고는 이렇게 끝이 났다.


이곳에서는 하루하루가 시트콤 같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었는데, 정말로 큰일이 터질 줄이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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