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빌어먹을 라시드

라시드 이야기 10

by 고추장와플

매일이 시트콤처럼 다사다난하고 지루할 틈이 없는 이곳에서의 또 다른 하루가 밝았다.

11월의 추위는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침낭과 여분의 이불로 꽁꽁 싸 매고 잤으니 적어도 얼어 죽지는 않겠지. 가스 난방이 꺼지니 아이들도, 우리도 침낭에서 나오는 것이 고역이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춥지는 않지만 공기가 차다. 이불밖으로 나오기 싫었다. 하지만 라시드의 친구가 가스가 새는 보일러를 고치러 온다고 했기 때문에 추워도 일어나야 했다.


난방이 되지 않는 11월의 아파트라 속이라도 따듯하려고 아침부터 뭇국을 끓였다. 난방도 안 되는데 빵 쪼가리 먹는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니까. 이렇게 따듯한 아침으로 한 끼를 해결하고 오늘 온다던 라시드의 친구를 기다렸다. 오늘 온다는 말에 어디 나가지도 않고 냉기가 도는 아파트에서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시간은 어느덧 오후 1시가 되었다.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있으니 더 추웠다. 점심시간이 되었으니 이번끼니는 라면으로 몸을 덥혀야겠다고 생각하고 라면을 먹고 또 기다렸다. 시간은 이제 오후 네 시가 되어갔다. 벨기에에서 수리공들은 날짜만 이야기해 주고 당일이 되어서야 시간을 말 해 주는 경우가 많다. 네 시까지 아무 소식이 없으니 이제 불안해진다. 게다가 라시드의 친구라니 더 못 미덥다. 처음부터 믿지를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토마스에게 수리공을 찾으라고 연락을 할 걸 그랬다.


결국 남편이 라시드에게 전화를 했다. 라시드는 아직 자기 친구가 안 왔냐며 전화를 하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네 시반, 점점 오늘 저녁은 따듯하게 보내리라는 희망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라시드에게 전화가 왔다.


"내 친구가 오늘은 바빠서 못 온대요. 내일모레, 월요일에 온대요."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내일도 아니고, 내일모레까지 난방 없이 자라고? 눈앞이 캄캄했다. 이틀, 삼일을 난방 없이 지내면 집은 온기도 완전히 사라져 냉장고가 될 텐데.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주말에 일하는 수리공을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이니 방법이 없었다.


라시드는 잠시 후 찾아와 자기 친구가 오늘 못 올 줄은 몰랐다고 사과를 하며 자기 집에 있는 전기 히터를 가져다줬다. 어김없는 '병 주고 약 주고'가 이번에도 예외 없이 벌어졌다. 한편으로는 라시드의 잘못은 아니고 친구의 잘못이니 어쩔 수 없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자기 집에 있는 히터를 가져다준 것도 라시드이지 않은가.


아파트를 다 덥히기에 1600와트 히터 하나는 겨우 손만 녹일 수 있을 정도였다. 박스 안에 분명히 전기담요가 있을 텐데. 시댁에서 나올 때 들고 온 박스 안 어딘가에 전기담요가 들어있었다. 10개도 넘는 박스를 다 뜯고 찾을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대로 얼어 죽는 것보다 박스 10개를 뜯어보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 짤짤이를 하는 심정으로 제발 처음 연 박스에서 전기장판이 나오길 빌었다.

꽝!


도박운은 없나 보다. 이래서 도박을 하면 패가망신을 하는 것이다. 나는 운이 없었다. 두 번째 박스에도, 세 번째 박스에도 전기장판은 들어있지 않았다. 여섯 개의 박스를 열고나서 소리쳤다.


"찾았다!"


재수가 아예 없으려면 열 개를 다 열어봐야 했을 수도 있었지만 여섯 개째에 찾았으니 재수가 정말 좋지도, 정말 나쁘지도 않은 것 같다.


전기장판을 켜고 자니 아이들도 덜 추워하고 무엇보다 추위에 매우 취약한 남편이 좋아했다. 추위에도 취약하고 눈물도 많은 사람의 쓸모는 어디에 있는가. 취약하지 않은 것을 찾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몸을 덥히고자 주야장천 차를 마셔대고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전기장판으로 버티며 월요일을 맞았다.


월요일은 남편이 쉬는 날이기 때문에 수리공이 오면 남편이 문을 열어주기로 했다. 출근을 해서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점심시간이 되어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왔어? 설마 아직도 안 온건 아니겠지?"

"아직 아무도 안 왔다 갔어."

"라시드한테 전화 좀 해봐."

"알았어. 지금 전화할게."


일이 바빠 집에 그 뒤로 전화를 하지는 못 했다. 따듯하게 난방이 다시 들어올 집을 기대하며 퇴근을 하고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집안의 공기는 출근 전과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춥고 으슬으슬한 아파트. 여전히 보일러는 꺼져있었다.


"설마 오늘도 안 온 거야?"

"그게... 라시드가 자기 친구 연락이 안 된대."


유유상종

끼리끼리 논다

초록은 동색

그 나물에 그 밥


이 말들이 괜히 생긴 건 아닐 텐데, 처음부터 믿지를 말았어야 했다. 라시드의 친구라면 라시드 2라고 생각을 했어야 했다. 속에서 욕지기가 올라왔다. 토마스에게 전화를 하면 건물관리인인 라시드가 처리를 해야 하니 어차피 같다고 생각한 내가 잘못이다.


일그러져 가는 내 얼굴을 보며 남편이 말했다.


"토마스한테 전화했어. 라시드 친구가 토요일에 오기로 했는데 안 왔고, 오늘 오기로 했는데 또 안 왔다고 했어. 이번에는 그래서 토마스가 직접 보일러회사에다 사람 보내 달라고 얘기했고 내일모레 온대."


이런, 빌어먹을.


또 이틀 뒤에 온다고? 방법이 없으니 또 이렇게 그냥 견뎌내는 수밖에. 나쁜 상황에서도 좋은 점을 찾아낼 수 있어야 진정한 잡초이지 않겠는가. 너무 추운 방 안의 온도에 아이들은 내 품을 파고들었다. 12살의 코밑이 점점 까매지는 사춘기 아들이 내 옆에 딱 붙어있는 날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찌 보면 보일러 고장이 나에게 선물해 준 귀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난방이 꺼져있어 이제는 바깥 온도와 별 차이가 없었다. 전기장판에 다닥다닥 붙어서 우리 가족은 또 이틀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