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이래야 벨기에지...

건물관리인 라시드 이야기 12

by 고추장와플

벨기에 고인 물.

그렇다. 나는 고인 물이다. 한 달 있으면 곧 18년이 된다.

이 나라가 편하다는 의미는 한국사회가 자랑하는 편리함과 효율성을 포기했다는 이야기와 같다. 하지만 벨기에에 오래 살았다고 해서 추운 게 안 추워지는 것은 아니다. 정말 더럽게 춥다. 11월인데 10일간 난방 없이 사는 것은 고인 물이 아니라 고인 물 할머니가 와도 춥다.


가스가 더 이상 새지는 않아도, 우리는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밥값이 비싼 유럽에서 외식은 사치다. 너무 추워 카페에서 커피를 시켜놓고 앉아있다가도 밥때가 되면 집에 들어와 밥을 했다. 쌀국수, 부대찌개, 미역국, 삼계탕 주로 뜨거운 국물 종류로 메뉴를 마련했다. 따듯함이 가실 때 즈음 다시 카페로 나가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가족끼리 영화관에 가서 영화도 봤다.


가스를 못 쓴다는 것은 난방이 안 되는 것뿐만 아니라 온수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기 주전자 포트에 물을 데워 찬물과 섞어 한 명씩 돌아가며 최소한의 물만 사용하여 샤워를 했다. 난방도 안 되는 차디찬 아파트에서 옷을 벗으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팔 한 짝 빼고 심호흡을 하고 나머지 한 짝을 뺐다. 그리고 숨을 참고 다시 바지에서 다리 두 짝도 빼낸다.


덜덜덜.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최단시간 내에 머리를 감고 물만 대충 뿌린다. 그리고 혹시라도 물이 부족할 경우를 대비해 또다시 전기포트에 물을 데워놓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집에 들어가면 추웠지만, 그 추운 가운데서도 우리는 매트리스 위에서 한 이불을 덮고 노트북으로 다 이루어질 지니를 함께 보며 몸을 녹였다. 일주일이 넘도록 난방은 구경도 못했지만, 이 와중에 수지는 참 예뻤다.


라시드와 벨기에 시스템의 환상의, 아니 환장의 콜라보레이션.


그렇게 10일간 내복에 잠바까지 입고 자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드디어 가스 검침원은 왔고 가스사용허가서를 받았다.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가스 귀한 줄 몰랐다. 당연한 줄 만 알았던 그깟 가스와 그깟 난방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 달이면 18년 차 고인 물은 또 이렇게 새로운 것을 하나 배웠다. 일상의 소중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 지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그렇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고맙다고는 못 하겠다, 라시드.

환장의 콜라보레이션을 선사해 준 벨기에도 마찬가지고.